한병철, 《땅의 예찬》
“모든 것이 이미 몰락에 바쳐진 시간. 그때 낙엽으로 뒤덮인 바닥에서 커다란 꽃 한 송이가 피어난다. 꽃은 정원을 특별한 분위기로 바꾼다. 생명이 차츰 기울어 가는데, 화려한 새 생명이 깨어난다.”
- 한병철, 《땅의 예찬》
기적, 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믿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신은 없다고 믿었고 신이 없기에 신이 주는 기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야 돌이켜보니 기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기적은 있었다. 점점 차가워지는 공기와 약해지는 생명 속에서 피어나는 가을크로커스와 가을시간너머Colchicum autumnale 꽃과 같이, 까탈스러운 추위와 얼음 서리를 뚫고 피어나는 수선화와 같이. 차츰 기우는 생명 속에서 화려한 새 생명이 깨어나는 계절처럼 기적은 어느 생에나 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염 속에서 딸의 얼굴을 떠올리며 죽어가던 어린 생명을 구한 한 남자처럼,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 다른 생명에게 전한 한 여자처럼, 오래도록 염원하던 시험의 합격자 발표 날 길가에서 소리치던 한 청년처럼, 내 집 한 채 사는 게 한평생 꿈이던 한 노부부처럼 기적은 어느 생에나 있다.
이제야 조금 알 것만 같다. 기적은 신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이,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저만의 시간 안에서 차곡차곡 쌓아 기적을 만들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