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크 로로, 《지극히 적게》
“우리는 고유한 정체성이 있다고 배워 왔다. 그러나 인간은 순간순간 변하는 존재로 딱 정해진 것이 없다. 예를 들어, 어릴 때는 시금치를 아주 싫어했더라도 지금은 아주 좋아할 수 있다.”
- 도미니크 로로, 《지극히 적게》
회사를 그만두고 후회한 적 없냐는 질문을 아직도 종종 듣는다. 사실 왜 없겠는가. 월급날, 보너스날, 긴 휴가, 그리고 여러 혜택을 받으며 회사에 다니는 동료를 볼 때면 드문드문 다시 직장인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하지만 가장 후회했던 순간은 월급날이나 보너스가 나오는 날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 모인 자리 명함을 주고받는 자리였다. 굴지의 대기업 명함부터 꽤 이름이 알려진 스타트업, 경쟁률 세다는 공기관 명함까지. 나도 한때는 남부럽지 않은 명함을 지녔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단숨에 알 수 있는 기업 로고가 박힌 명함이었다.
퇴사 후 오랫동안 명함이 없었다. 어느 기업의 어느 팀의 사원, 대리, 차장이 아닌 나를 뭐라고 규정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작가, 기획자, 책방 운영자, 연구원 등 어느 것 하나 내 옷 같지 않았다. 책방과 관련된 미팅 자리에선 책방 운영자가 찍힌 명함을 사용했지만 명함을 받고 무시하는 듯한 시선을 던진 사람을 만난 후로 소심하게 꺼내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서 명함은 신분증과도 같다. 아니 신분과도 같다. 손바닥보다 작은 종이에 적힌 회사 이름, 직함, 주소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지금의 모습만이 아니라 과거까지 추측하면서. 그러나 명함은 퇴사와 동시에 내 것이 아니다. 이제껏 내 것, 내 이름, 내 얼굴로 몇십 년 사용했을지라도 단숨에 내 것이 아니다. 사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내 것은 내가 만들고 내 이름은 내가 칭하고 내 얼굴은 내가 찾아야 한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내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되어야 한다.
지금 나의 명함엔 “도시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들을 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글을 쓰는 일도 책방을 운영하는 일도 도시를 공부하는 일도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한 일이지 않을까. 언제 나의 명함 속 문구가 바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딱 이 정도가 내 모습이다.
이제 나는 어떤 명함을 가졌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나아가는가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