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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Aug 06. 2018

저출생 고령화 시대의 상상력

넥스토피아 전시 기획과 관련하여


저성장 저출생 고령화 시대의 새로운 공동체는 가능할까?

 

우리는 지난 50여 년간 고도성장을 구가해왔다. 생산과 소비는 나날이 늘어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꾸준히 나아졌고, 내가 노력만 한다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신념도 견고해졌다. 그 결과 국내총생산(GDP) 4만 불 시대가 눈앞에 와있다. 그런데 과연 경제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우리는 점점 더 풍요로워질까? 역사를 돌아보고, 환경문제와 사회적 제약들을 고려한다면, 이제 더는 과거와 같은 경제성장과 번영은 기대난망으로 보인다. 그래도 그동안 경제가 성장했기 때문에 사회체제가 유지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경제성장만이 답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경제성장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모순과 문제 속에 또 다른 복병이 나타났다. 고령화와 인구감소가 그것이다. 더 풍족하고 인간다운 삶이 의심받기 시작하면서, 청년들은 결혼을 꺼리고 신혼부부들은 아이를 낳지 않고 있다. 1971년에 비해 지난해 출생한 아이의 숫자는 1/4 수준이다. 급격한 고령화와 더불어 혼자 사는 1인 가구의 비중도 이미 인구의 30%에 육박하고 있다. 2035년에는 인구의 40%가 혼자 살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혼자 사는 빈곤청년/노인층은 이미 사회적 문제로 부상했다. 경제성장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성급한 예상이긴 하지만 신생아가 줄어들고 고령화가 진행되는 인구 전환은 사회뿐만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형태까지도 바꾸어 놓을 개연성이 높다. 경제학자 게리 베커는 "출생률의 급락과 고령화는 생산가능 인구의 수보다는 질이 중요한 새로운 시대로 우리를 이끈다”라고 말한다. 물론 늘 적정인구를 원하는 국가와 자본은 이런 급격한 사회변화를 반기지 않는다. 덩치를 지속적으로 늘려야 하는 자본에게 생산가능 인구와 소비시장은 절대적이고, 국가도 일할 사람이 줄어들고 부양해야 할 고령자가 느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개인 간의 사회경제적 격차를 키우고 그에 따른 사회적 불안도 증폭시킬 것이다. 이에 따라 국가가 책임져야 할 국민의 삶의 영역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생산가능 인구와 소비를 많이 하는 40~50대 인구가 줄어들면 소비가 위축돼 경기가 침체되고, 이주민과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은 또 다른 사회적 진통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제주도 난민 청와대 청원 사건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는 이주민에 대한 거의 묻지 마 식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인구가 급격하게 줄고 있는 지방도시 가운데 몇 곳은 소멸될 수 있고, 이런 위험에 처한 도시를 살리기 위한 정책들은 국민적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지금 같은 정부의 출산 강요책(?)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면 전환적 시도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우리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 삶에 생산과 소비, 그것을 통한 경제적 부는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일까? 물질적 풍요를 향한 욕망 속에 파국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출생률 하락의 본질적인 해결책은 문제인가? 그리고 고령화는 우리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만 줄 것인가?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에 출간한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에세이에서 “기술이 진보하면 시간당 생산량이 증가하므로 생계를 위한 필요 노동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 테고, 100년 후면 하루 3시간 일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라고 예측했다. 나머지 시간은 예술 문화 철학적 사색 등에 시간을 쓰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가 잡은 100년 후가 2030년이다. 실현 가능성은 아직 멀리 있지만, 곱씹어봐야 하는 점은 과학기술의 진보가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인구와 소비의 감소를 걱정하기보다는 분배와 공유가 앞으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이고, 지금 같은 물질적 성장의 추구보다는 더불어 함께 행복하게 사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왔다. 불황이 확산되고 경제성장이 멈추면 그런 조정 능력은 힘을 잃게 된다. 피해자는 주로 경제적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만이 아니라 우리들 대부분이다. 경제적인 불안정이 커질수록 장래에 대한 더 큰 불안을 갖고 살게 되고, 그 결과로 마을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세먼지와 폭염, 대기오염 등 악몽의 도래는 정신적 환경적으로도 ‘여유 없는’ 삶을 펼쳐놓는다. 지금  우리가 방향을 전환하지 않으면 보게 될 것은 장밋빛 미래가 아니라 소멸되어 가는 세계의 전조들인 것이다.


우리는 시선을 경제적 성장과 풍요에서 사회경제적 차별과 불평등을 공동체 안에서 치유하고 품을 방법이 무엇인가로 돌려야 한다. 생산가능 인구와 소비인구 감소가 일으킬 사회적 문제 해결에 매달리지 말고, 기술진보로 획득한 부를 사회 구성원들과 어떻게 나누고 누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독점에서 공유로, 혼자만의 삶에서 더불어 함께 사는 삶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인구가 줄어든다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쉽게 답을 찾으려 한다면 그 답은 오답일 확률이 높다. 함께 살아가는 것의 의미, 타자와 소통하는 방법,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도시와 건축의 변화 등에 대한 질문을 놓고 함께 진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저성장과 저출생, 그리고 고령화는 우리 각자에게 곧 도래할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상상을 요구한다. 우리가 꿈꾸는 삶과 일을 펼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에 대한 요구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공간에 대한 꿈 역시 획일적인 해결책은 없다. 고민이 부족한 간편식 해결책일수록 우리를 점점 더 독존의 세상으로 밀어낸다. 사회적 부의 분배와 공유 그리고 연대하는 진짜 살맛 나는 공동체는 작은 불씨가 모여 우리의 삶에, 어떤 순간에 결정적인 힘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인구감소, 고령화, 1인 가구의 증가라는 사회적 문제를 다양한 개인들의 공동의 문제로 환원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넥스토피아> 전시는 저출생 고령화에 따른 사회적 변화를 현실적으로 고민한  건축가들의 건축적 제안들을 모은 것이다. 김성우 박창현 이치훈 임태병 조병수 조재원 등 참여 작가들은 각자 드로잉, 이미지, 영상과 사진, 텍스트, 모형 등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김성우는 엔이이디건축사무소 겸 주택인 일원동 주거복합 프로젝트를 통해 소필지 주거지역의 주거복합 모델, 개별 건물과 지역 사이의 공동성을 고민했다. 박창현은 “심리적 경계”라는 전농동 프로젝트를 통해 공동주택에서 공용공간과 사이 공간을 통한 적절한 커뮤니티 전략을 소개했다. 임태병은 토지임대부 프로젝트 풍년빌라를 통해 지인 공동체의 가능성과(소유권이 아닌) 장기 점유권, 그리고 출구전략을 실험 중이다. 조재원은 대학로 코워킹 스페이스 공공그라운드를통해 유연하고 노마딕 한 생산(일터)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을 이야기했다. 이치훈은 우포자연도서관프로젝트를 통해 공동체를 위한 열린 공간으로서의 도서관 기획과 그간의 과정을 보여줬다. 조병수는 이중성의 공존- ‘개인주의적열림주의’를 주제로 부산 F1963 + 네 조각 집을 통해 개인주의와 개인성의 보장을 통한 열림주의와 공공성의 확보하는 공간과 건축을 제안했다.  


이들은 삶과 일터에 대한 조금 다른 건축적 상상의 파편들로 우리의 환경, 사회, 기술의 변화를 건축적 감수성으로 발견하는 작업들이었다. 어쩌면 이 전시는 우리들이 지나온 길과 다가올 미래의 불안과 불안 속에 섞인 희망과 나눌만한 근심에 대한 이야기들 인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자리를 통해 이런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김성우 <단지에서 동네로-일원동 단독주택 리노베이션>



박창현 <심리적 경계-유일주택>

참여 건축가 인터뷰 영상 https://youtu.be/bqN5_98h60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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