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의동 집> <용두동 집> <팔판동 집> 기획자의 공동체 집 만들기
1.
김현 선생의 <행복한 책 읽기>를 읽다가 발견한 미르치아 엘리아드(Mircea Eliade)의 아름다운 문장 하나.
"망명자는 누구나 이타카로 되돌아가고 있는 율리시즈이다. 모든 생활은 오디세이, 이타카로 가는 길, 중심으로 가는 길의 모사이다. 망명자는 자기 방황의 감춰진 뜻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중심으로의 한 입사적 시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저마다 자신의 다리와 악으로 집으로 가고 있다."
그곳이 너무 멀거나, 희미하거나, 기억조차 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고향, 작은 공동체가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우리는 실제 존재하는 어떤 마을이거나 마음속에 있는 꿈의 장소이거나 돌아갈 곳을 향해 살아가고 있다. 그곳은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일 수도,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영적 장소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만의 이타카(ithaca)를 마음속에 품고 산다. 그곳에 대한 기억이 아련할수록 그리고 현실이 고단하면 할수록 그곳에 대한 그리움은 커진다.
우리의 현대사는 도시화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자유를 찾아, 돈을 좇아 많은 사람들이 주저 없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모여들었다. 현재 한국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시에 거주하고,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인 2천5백만 명가량이 서울과 수도권에 모여 산다. 그리고 이러한 이주의 역사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전체 국민의 20 퍼센트 정도는 매년 살던 집에서 떠난다. 산술적으로만 본다면 오 년마다 전체 국민이 한 번씩 집을 옮기고 있다. 정 붙일 시간적 여유도 없이 우리는 끊임없이 짐을 싸고 있다.
도시에서 집은 애정, 공유, 협력 등 비물질적인 가치보다는 물질적인 크기(평수)로 평가된다. 많은 도시민에게 집은 가장 덩치 큰 자산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집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형극 같은 것이기도 하다. 저소득층에게 집은 가난을 재생산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로 작동 중이다. 그리고 그 사이 개발 바람으로 고향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는 하나둘씩 사라지고 없다. 그 속도 또한 너무 빠르기에 정착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성찰은 멀고, 방황의 숨겨진 뜻은 해독 불가한 상태이다. 특히 한국사회는 90년대 중반 이후 유례없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속화됐고, 위험사회(risk society)가 우리 삶을 규정짓고 있다. 고된 노동을 견디고 있지만, 부모 세대보다 더 좋은 환경을 누리고 싶다는 청년 세대의 희망은 아득히 멀어졌다. 날은 계속 더워지는데, 수입은 늘지 않고 오히려 줄고 있다. 내 주변의 친구와 후배들도 대부분 비슷한 신세다. 대다수는 괜찮은 집을 갖는 꿈을 포기했다.
더구나 포스트 성장시대, 건조하고 살벌한 직교좌표의 사회에서 25퍼센트 정도는 반겨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혼자만의 방으로, 그 가운데 10만 명 정도는 몸만 겨우 누일 수 있는 옥탑방이나 고시원으로 돌아가고 있다. 무한경쟁시대의 도시 풍경은 사람들이 서로를 외면한 채 작은 픽셀 안에 자신의 몸을 위탁하고 있다. 공동체와 단절된 낱개화 된 개인들의 공간은 옹색하기 그지없다. 이웃도 가족도 없이 자기 한 몸 건사하기 바쁜 '무연'의 개인들이 분주하게 살아가는 공간의 집합이 오늘날의 도시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소비 이외의 다른 전망을 제시할 수 없게 됐다. 상품화된 화려한 거리는 지역 사람들을 위한 공동의 공간을 품기 어렵다. 점점 공동체 안에서 작으나마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져 망각되지 않는 기억의 공간은 희미해지고 있다.
그리고 비슷한 평면 속에서 이웃과 단절되어 있는 대다수의 삶의 공간은 '단지'라는 또 다른 단위에 갇혀서 소유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주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대다수의 한국 도시들은 이리저리 막히고 나눠지고 있다. 포용보다는 배제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임대주택은 게토화 되었고, 주상복합 아파트는 게이티드커뮤니티로 외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현재 우리의 삶의 터전은 삭막하고 볼품이 없다. 나날이 활력이 떨어지는 교외지역, 늘어나는 실업자와 노인빈곤층, 사회적으로 고립된 청년층에 대한 고민들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2.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작은 공동체가 우리 삶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삶의 공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정림건축문화재단에서도 '협력적 주거 공동체'를 고민하고 있다. '000집' 프로젝트라는 동네와 몸과 마음이 연결된 집을 현실적으로 그려 보는 프로젝트를 통해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와 작은 동네 사회권을 만들자는 것이 그 내용이다. 실제로 <통의동 집>을 비롯하여 몇 개의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나만을 위한 독립공간과 함께여서 즐거운 공유공간의 균형"
<통의동 집>의 슬로건이다. <통의동 집>의 경우 복도와 계단을 빼면 전용률이 평균 절반 정도다. 입주자들은 방만 전용공간으로 사용하고, 욕실, 화장실, 주방은 공유한다. 세탁기, 건조기, 그리고 시디플레이어도 공유한다. 제 1실의 월세는 57만 원이다.( 임대료와 보증금을 매년 조금씩 내리고 있다.) 7명이 함께 살고 있는데, 5년이 지난 시점에서 1명만 빼고는 모두 새로운 입주자다. 거주 기간은 천차만별이다. 평균 1~2년 정도 거주하고 있다. 건축가, 요가 강사, 공무원, 은행원, 학생 등 직업도 다양하다. 그들은 요리수업을 듣고, 서울성곽을 걷고, 포럼에 참석하고, 동네 사람들과 점심과 저녁을 같이한다. 물론 이들의 일상은 대부분 혼자 밥 먹고, 싰고, 잔다. 공용공간에서는 활발한 교류가 있지만, 방이 있는 공간에서는 철저하게 프라이버시를 지킨다. 사실 누가 그렇게 하자고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공간을 존중하고 있다.
<통의동 집> 1층엔 정림건축문화재단의 사무실과 <라운드어바웃>이 있다. 이곳이 입주민과 지역 사이의 점이 공간으로, 전체 공간의 반을 사무실로 반은 지역과 연계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라운드어바웃>에선 포럼, 영화 상영, 소박한 모임이 열린다. 길을 지나가는 누구나 들어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다. 입주민들이 친구들과 모임을 갖거나, 책을 빌려보는 곳이고, 그들의 우편물을 받아주고, 불편을 들어주고, 저녁 퇴근길을 밝혀주기도 한다.
오는 9월에 다양한 세대의 여섯 가정이 모여사는 <용두동 집>을 오픈한다. 70대와 30대 부부, 아이가 넷인 가정이 지역 교회 사무실 그리고 대안 시민 학교가 함께 공간을 쓴다. 이 집의 기본적인 목표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가능한 한 낯선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게 하는 것이다. 공간 사용의 밀도를 높이려고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이를 위한 기본적인 조건은 전체 공간의 1/3을 공동체와 공유하는 것이다. 공유공간은 작은 서재, 주방, 동네 서점과 지역의 대안 시민 학교다. 1층에 있는 동네 서점은 낮과 밤에 사용자가 바뀌며 입주민들과 지역의 사람들을 연결하는 매개 공간이 된다. 예를 들어, 낮에는 동네 서점이었다가, 밤이 되면 입주민들의 서재나 사랑방이 될 수 있다. 이런 매개공간을 통해 내 살림과 옆집 살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그것을 통해 협력하고 연대하는 삶터를 상상해보고 있다. 이 공간을 통해 입주민들은 지역과 만나고 사회적 관계를 맺어 갈 것이다. (또한 향후 이 공간은 이미 설립한 주택협동조합을 통해 공동체 자산화를 실험하려고 한다.)
그리고 친구들과 더불어 상계동에 3명이 함께 사는 <상계동 집>과 10년 가까이 비어있던 청와대 바로 앞 팔판동의 2층 집을 수선해 5명이 함께 사는 <팔판동 집>을 만들었다. 오래되거나 빈 집을 청년들의 사는 방식에 맞게 개조했다. 오래된 동네와 집에 매력을 느끼며 집의 분위기나 주변 경관과 이웃에 우선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 비싸지 않은 임대료를 부담하며 살 수 있다. <상계동 집>은 이미 1년 넘게 운영 중이며, <팔판동 집>도 이번 달이면 공사가 끝나고 입주민을 모집한다. 모두 1인 가구를 위한 집이다. 임대료는 혼자 쓰는 방이 크기별로 매달 40만 원에서 50만 원 선인데, 임대료의 인상 없이 장기 거주가 가능하다. 이 집들은 수익을 바라보지 않는 프로젝트로 임대인과 임차인의 합의에 의한 새로운 임대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3.
알랭 드 보통은 건축의 역할 가운데 하나로"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사회에서 결여된 특질을 제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000집 프로젝트'는 우리가 한 번도 겪지 못했던 '낱개 사회'라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협력을 통해 대안적 확실성을 만들어내려는 일종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고향에 대한 꿈들을 모아 고향 집 같은 집을 만드는 것을 꿈꾸며 시작했다. "공동체와 몸과 마음이 연결된 시끄러운 집" 말이다. 지금은 네 개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관계의 불확실성이 강화됨에 따라 그에 대한 대안으로 설득력을 얻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주위의 이웃들과 상호 호혜적 관계를 맺는 공동체가 살아 숨 쉬는 사회적 주거에 대한 필요성과 이를 위한 공간적 해결을 고민해야 하는 당면 과제와 맞물려있다. 우리에겐 혼자이면서도 함께 살아갈 고향 같은 공동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공동체가 있다.
거기에 속하라. 기쁨을 느끼라.
시끄러운 길을 걷는
소음 속에 있는 기쁨을"
-루미. <영혼의 공동체>
*루미는 페르시아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