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네필 스타터 팩 04]
폴란드 영화 팬픽(Fanfik, 2023)은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다. 영어 제목은 'Fanfic'이지만, 검색의 어려움 때문인지 영어권 리뷰에서도 'Fanfik'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는 듯 하다. 원작 소설(Natalia Osinska 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퀴어 하이틴 영화는, 주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퀴어 인권이 취약한 폴란드에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존재 의의가 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LGBT 프리 존('성소수자 청정 구역'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을 내세우는 지역이 있었던(몇몇은 이후 철회했다고 하나 전부는 아닌 듯하다) 나라에서 퀴어 청소년의 정체화와 성장을 다루는 영화가 나온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을 통해 창작과 퀴어오타쿠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주인공이 뜬금없이 팬픽을 쓰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영화 평들이 있었고, 실제로 해당 설정이 극에 잘 붙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창작자들의 의도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주인공은 왜 글을 쓰는가. 그는 팬픽을 쓰면서 현실을 회피하는 동시에 자각하고, 또 위로를 얻는다.
당사자의 이야기는, 언어가 적절히 사용되지 못하고 어설픈 비유로 가득하더라도 당연히 의미가 있는 법이다. 누구나 자신의 서사를 말할 수 있다. 그래야만 한다. 팬 픽션-2차 창작의 껍데기를 빌려서라도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면 괜찮다. 자신을 담아 써내려간 글이 디나이얼의 정서로 차있든,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작용하든 상관없다. 그래서 해당 설정은, 미디어에서 충분히 재현되지 못하고 현실의 삶에서도 마음 편할 날 많지 않은 퀴어들에게, 그간 팬픽이 해온 역할을 이 영화도 해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주인공은 자전적인 캐릭터가 나오는 소설을 온라인에 연재하는 십대 청소년이다. 그 캐릭터는 인칭대명사 he를(폴란드어로 jego) 사용하고, 외형은 커트 코베인마냥 머리를 풀어헤진 밴드맨이다.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라고는 학교 친구뿐이지만.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주인공은 종종 아버지의 우울증 약을 훔쳐 먹는다. 어머니가 계시진 않아도 별 부족함 없이 자라왔고, 교우관계나 성적이 나쁜 것 같지도 않은데 그는 불안하고 답답하다. 그러나 레온이라는 소년이 전학 오면서 주인공의 일상은 변화를 맞는다. 그는 레온을 자신의 팬픽에 새로운 캐릭터로 등장시킨다. 파티에 갔다가 비를 맞고 레온의 옷을 빌려 입는다. 레온은 그런 주인공을 장난삼아 '토시엑 Tosiek'이라고 부른다. 소년의 이름으로 불린 주인공은 직감한다. 자신은 '토시아 Tosia(같은 어원의 여성형 이름)'가 아닌 토시엑이라는 사실을, 지난 삶이 내것이 아닌 양 계속 느껴왔던 이유를 깨닫는다. 이후의 줄거리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주변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갈등을 겪고, 연인과도 소원해지지만 하이틴 영화답게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토시엑이 줄곧 써오던 팬픽처럼.
자신 모르게 찍힌 사진들이 퀴어혐오적인 캡션과 함께 SNS에 올라오고 아버지의 직장 부하직원들이 토시엑을 (퀴어라는 이유로) 위협하는 것, 무지한 친구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본인이 남자라고 생각하는지 질문하는 장면, 트랜스젠더퀴어가 겪는 젠더 디스포리아와 유포리아의 묘사 등, 영화는 약간은 불균질한 종합선물세트처럼 보인다. 현실적이거나 무섭거나 또 꿈만 같은 순간들을 뒤섞어 감상자에게 열심히 들이민다. 극의 전개는 플롯이라 할 게 없을 정도로 선형적이고 단조롭다. 하지만 영화는 지금 당장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실패작도 불량품도 아니라고, 두렵지만 원해도 된다고 말해준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제작 과정이 다큐멘터리로 나와있다. 넷플릭스 코리아에서는 볼 수 없지만 vpn을 돌려 폴란드 국가로 접속하면 영자막으로 볼 수 있다.. 제목은 We Are Perfect(폴란드어 원제 Jestesmy idealni)이며, 트랜스젠더퀴어들이 Fanfik 영화에 오디션을 보고 자신들의 커밍아웃 스토리를 공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큐멘터리 속 퀴어퍼레이드 장면에서 'Never Rainbow, Never Red'를 외치는 혐오세력의 모습은, 성소수자의 존재와 그 인권운동을 두고 '종북좌파게이' 운운하는 한국의 혐오세력과도 겹쳐보인다.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비슷하게 좆같구나 싶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많은 것이 토시엑 역을 맡은 모델 출신의 배우 '알린 셰브치크 Alin Szewczyk'의 매력에 기대고 있음을 짚어야 할 것 같다. 키 크고 잘생긴 이 젠더퀴어 배우는 올해 들어 호르몬 대체 요법을 시작했다(그의 소식은 https://www.instagram.com/ballin.sze/ 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폴란드 영화에서 트랜스젠더 캐릭터를 소화한 최초의 트랜스젠더 배우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그의 향후 커리어를 응원한다. (최근에는 보그 폴란드의 2025년 프라이드먼쓰-6월-호의 커버를 장식하기도 했다. https://www.vogue.pl/a/niebinarny-transmeski-aktor-i-model-alin-szewczyk-opowiada-o-pracy-w-branzy-mody-fanfiku-i-poszukiwaniu-siebie 디제이로도 활동하는 듯하다.)
+ 폴란드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게 봤는데, 몇 편 안 본 작품들마저 우연하게도(?) '작전명 히아신스'나 '수어사이드 룸'과 같은 퀴어 영화들이었다. 앞으로 보고 싶은 작품을 말해보자면 마우고자타 슈모프스카 감독의 2023년작 'Woman Of...'를 들 수 있겠다. 이 역시 퀴어 영화네...
++ 넷플릭스 드라마 'The OA'에서 트랜스남성 역을 맡았던 배우 이안 알렉산더 역시 드라마 작업 이후 HRT를 시작했다. 드라마 'Glamorous'에 출연한 배우 미스 베니 또한 극 중 배역과 그녀의 실제 삶의 여정이 묘하게 겹친다. 이야기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살게 하는 힘이 분명 있다.
+++ 프라이드 먼쓰의 마지막 주말이니까, 소원을 여럿 담아 이 글의 제목을 정했다. 엘리엇 페이지의 자서전 <페이지보이>에서 가져온 문장이다(송섬별 역). 원문은 'Wishes can come 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