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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의 언어(2019)>

[퀴네필 스타터 팩 05]

by 수환
Lingua_Franca_.jpg 서로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의 언어(Lingua Franca)>


Lingua Franca(링구아 프랑카)는 1언어/모어가 다른 이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공통어를 의미한다. 영화의 이러한 원제가 '사랑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전달이 어려운 감정들을 미처 담아내지 못하게 된 점은 조금 아쉽다. 극에서 로맨스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일리는 있으나, 이 영화는 편견의 벽에 가로막혀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그래서 이해받지 못하는 한 여성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올리비아는 필리핀에서 미국에 온 이민자이다. 그녀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 올가를 돌보는 입주 도우미로 일하면서 위장 결혼을 알아보고 있다. 언제 ICE(이민세관단속국)에 잡혀갈지 모르는 자신의 처지와, 미국으로 초청해달라 부탁하는 본국의 가족들 때문에 그녀에게는 그린 카드가 절실하다. 그러나 위장 결혼을 하려던 남자는 다른 여성과 결혼하겠다며 계약금을 돌려준다.

올가의 손자 알렉스는 집안의 골칫덩어리이다. 그는 알콜중독으로 재활원에 갔다가 돌아온 뒤, 친척의 도움으로 도축장에 취직하지만 일을 잘 해내지는 못한다. 알렉스가 올리비아의 휴일날 할머니를 돌봐주러 오면서 두 사람은 처음 마주치고 이내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상황을 알게 된 알렉스는 자신이 지켜주겠다며 청혼하지만, 올리비아는 자신의 운명을 다른 이의 손에 쥐어주지 않는다.

올리비아는 'undocumented' 트랜스여성/미등록 이주민이다. 그녀는 필리핀에서 법적 성별을 정정하지도, 미국에서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가지지도 못했다. 영어와 타갈로그어, 세부아노어 등 여러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올가는 그녀의 보살핌을 꼭 필요로 하지만, 대 트럼프 시대의 미국에서 올리비아는 무능하고 가난하며 불법으로 거주하는 하찮은 존재로 격하된다.

극중 올가와 알렉스 또한 러시아계 이민자 집안 출신이나, 그들은 백인으로 패싱되며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그래서 카메라가 올리비아의 다이레이터를, 필리핀 여권을 화면에 비출 때 알렉스는 퀴어혐오적인 태도의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실없는 소리를 떠들어댈 수 있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알렉스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 그린 카드를 얻는 데 상대방을 이용하지 않기로, 혹은 시혜적인 구원의 손길에 답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트랜스인 연인에 대한 마음을 정하고 전하는 것도 술에 취해야만 겨우 가능했던 알렉스는 그녀의 선택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는 디스포리아와 디아스포라의 교착점에 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감독과 주연, 제작에 편집까지 도맡은 이자벨 산도발 Isabel Sandoval 또한 미국에 거주하는 필리핀 이민자/트랜스여성이다. 사려 깊은 창작자가 섬세하게 조형해낸 이야기는 다시 돌아온 트럼프의 시대에 더욱 스산하게 다가온다.

올리비아의 공포는 (극중 배경인) 브루클린의 대기를 불길하게 채운다. 국경을 건너 성별을 건너 여전히 떠도는 삶의 정동은 극의 결말처럼 갑작스럽고 모호하다. 인간의 정체성은 단일하지 않다. 일해서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 영주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체류자, 아시안 트랜스여성 등 여러 겹의 정체성은 그녀의 팍팍한 삶을 규정한다. 그러나 그 정체성들의 총합만으로 올리비아가 정의될 수 있는가? 배제와 억압에 시달리는 약자성들을 경유해 도달한 곳에는 한 인간이 있고, 공통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삶이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사람으로 사랑할 줄 안다. 다만 그러지 않기로 기꺼이 결정했을 뿐이다. 그런 세계가 이미 도래했다.




+ 영화를 보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 수 없었다(물론 비유적인 표현이다... 너무 좋아서).

++ 언어화의 중요성에 대해 다들 많이 이야기한다. 그에 비해 [타인의 언어를 자신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은 곧잘 간과되는 듯하다. 거기에서야 다른 시작이 가능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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