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우등생이 곧 모범생이라고 생각한다.
우등생이 성인이 되어서도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사회의 기준이 되는 것처럼 말한다.
나는 결혼 전부터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지인이 기획한 마을 공동체와 교육을 주제로 한 작은 포럼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참가자 중에 EBS PD님이 한 분 계셨다. 아마,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봤을 실험 다큐멘터리의 연출자였다. 운 좋게 나는 그 PD님과 동석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PD님이 다큐 제작의 뒷이야기를 해 주셨다. 촬영을 할 때, 외국도 많이 다녀야 해서 대학생들 중에 원어민처럼 영어를 말하고 쓸 수 있는 학생들을 찾았다고 한다. 일부러 어떤 기준을 가지고 뽑은 건 아닌데 크게 A와 B, 두 그룹으로 나누어지더란다.
A그룹은 일을 시키면 하나하나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일을 좀 하다가 묻고, 또 묻고 마치 하나라도 실수하지 않으려고 굉장히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결과물은 딱 원하는 대로 잘 처리해서 주었다. 반면, B그룹 학생들은 지시를 듣고 한 번에 일을 마무리해서 왔는데 예상 밖의 결과물을 갖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나이 먹은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도 있고,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서 질문하고 의견을 개진했다고 한다. PD님은 우연이라고 보기엔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A그룹은 강남이 집이고 특목고 출신의 대학생들이었고, B그룹은 강북이나 지방의 일반고 출신으로 자기 필요에 따라 약간의 학원만 다닌 대학생들이었다고 한다.
이 학생들이 앞으로 이 사회에서 어떤 구성원으로 성장해 나갈까 궁금하다. 어쩌면 몇 년 전 시국을 보면서 미래의 그들의 몇몇 모습을 이미 우리는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몇 개월 간의 국정농단 사태의 중심에 선 고위 관리들은 입으로는 죄를 부인하지만 그들이 남긴 수많은 필기 노트가 정황을 정리해주는 아이러니를 보였다. 그들은 마치 학창 시절 그들이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보여주듯 아주 꼼꼼하게 필기를 했다. 지시가 아무리 잘 못 된 것이라고 해도 묵묵히 받아쓰고 실행했다. 그중 아무도 ‘이것은 잘 못 된 것 같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분도 아이들에게 ‘건강’이 최고라고 하지만 가끔은 우리 아이가 수능 시험지 씹어 먹는 소년소녀 급제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윗사람의 말을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잘 못 된 것은 아니다. 좋은 성적을 얻으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의 생각을 올바른 방향으로 잘 전달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이런 개인들이 모여 서로의 생각을 존중할 줄 아는 사회로 만드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등생의 덕목은 좋은 성적일 것이다. 모범생의 덕목은 말 그대로 타의 모범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타인에게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머리는 좋으나 염치없는 인간들이 저질러 놓은 재앙이 더 이상 사회를 힘들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