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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감독 Aug 22. 2023

넷플릭스 D.P 1&2 정주행 후.

나의 군생활의 추억

디피2가 오픈되고 나서도 별로 흥미가 가지 않았다.

그놈의 군대 이야기.


어느 날, 아내가 패드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양미간에 잔뜩 찌푸린 채로.

아내 옆으로 다가가 슬쩍 보니 시즌1인지 2인지는 모르겠지만 군복 입은 정해인의 얼굴이 나오는 걸로 봐서는 디피 시리즈가 분명했다. 지나가는 말로 나는 시즌1도 안 봤는데 했더니 아내가 화들짝 놀라며 1도 안 봤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며칠. 


글도 쓰고 싫고, 책도 손에 안 잡히고 이것저것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 그렇다고 잠도 오지 않는 난감한 상황에서 그래. 디피나 볼까하고 넷플릭스를 켰다. 원래 마음은 시즌1은 패스하고 2부터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메인 화면에 있는 썸네일을 터치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보긴 했나 보다. 그냥  탈영병 잡는 디피 애들 이야기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구교환의 '잘만 돌아가지요~'라는 유명한 대사가 나오고 아 시즌 1이네 하고 확인했다. 시즌 2부터 다시 볼까 하다가 여기까지 본 것이 아까워 그냥 다 정주행 하게 됐다. 



시즌1을 안 봤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나는 드라마보다 주로 영화를 챙겨보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인물과 스토리가 이어지는 줄 몰랐다. 하여간 정주행을 하고 나니 내 군대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도 군대에서 극 중에 갈굼을 당하는 병사들만큼이나 갈굼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신병 시절 자대배치 후 100일 동안 모든 일을 다 당했다.


나는 운전병 출신이다. 논산훈련소에서 운전병을 교육하는 후반기 교육부대인 야전수송교육단(야수교)에서 8주 간 2.5톤 (두돈반) 운전을 교육받고 경기도에 모 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야수교를 수료하면서 나는 우수 교육생으로 상을 받았다. 교육 중에 운전 실습 시험? 그런 걸 보는데 거기서 1등을 몇 번 했다. 처음에는 차가 너무나 무쇠덩어리 같아서 어리바리했는데 얼추 적응이 되면서 운전을 곧 잘하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자대배치받자마자 4박 5일의 휴가를 갈 수 있게 되었다. 

적응 기간이 1주일이 지나고 나는 곧장 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휴가를 떠나는 첫날 우리 대대는 1년에 한 번 있는 큰 훈련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부대 전체가 철모를 쓰고 탄띠를 하고 위장을 한 채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데 나만 반짝반짝 빛나는 A급 전투화에 전투복을 입고 행정반에서 휴가 신고를 했다. 휴가 신고를 하고 나오다 나의 운전병 사수로 결정된 말년 병장 선임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에게 가볍게 한마디 했다.


"뺀질이. 복귀하고 보자."

"충! 성!"


나는 그것이 그냥 잘 다녀오라는 인사인 줄 알았다. 


나는 휴가를 나가서 서울에서 있었던 친척 누님의 결혼식에도 참석하고 부산으로 가서 친구들과 잘 지내다가 복귀를 했다. 복귀를 하는 날은 그 빡센 훈련이 마치는 날이라 나도 정신없이 정리를 하고 지나갔다. 


그다음 날부터 나의 악몽은 투 트랙으로 출발한다. 

1번 트랙은 운전병 사수가 나에게 운전 어느 정도 하냐라고 물었고 나는 자신 있게 야수교에서 상도 받았고 어떤 차량이든 운전에 자신 있다고 이등병답게 큰 소리로 답했다. 그 사수는 실실 쪼개더니


"씨바. 존나 잘났네?"라고 비릿한 미소를 날렸다. 그때부터 그 선임은 보초를 서고 새벽에 들어오는 나를 안 자고 기다렸다가 군기가 빠졌다며 스쿼트를 30분을 시키고 팔 굽혀 펴기를 30분 시켰다. 다음 날, 수송부에 나가면 매일 아침 차량점호를 한다. 수송부 전체가 차량 앞에 도열해서 차량을 함께 검사하는 것이다. 두돈반 트럭은 보닛이 무쇠덩어리라 앞 펜더에 올라타서 양손으로 들어 올려야 들린다. 하지만 내일 밤 얼차려를 받던 나는 어깨가 머리 위로 올라가지 않았고 벌벌 떨다가 보닛을 세게 떨어뜨리면 사수는 나를 포폭으로 두 돈 하부로 기어 들어가게 했다. 운전석 아래까지 기어들어갔을 때, 운전석 아래에서 발길질을 하면 들어간 사람의 왼쪽 갈비를 정확히 때릴 수 있다. 나는 100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밤마다 아침마다 구타가혹 행위를 당했다. 밤마다 침낭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으면 같은 이등병이지만 후임들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운전병 사수의 가혹행위가 정도가 심해지자 사수의 동기들이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 선임들이 나를 빼돌린 다음에 죽을 상을 하고 있는 나에게 신고만 하지 말아 달라고 사정했다. 우리 제대하고 나면 너도 편해지고 모든 게 편해진다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소름 돋게도 디피 중의 대사와 거의 같았다.


나는 감히 신고할 생각을 못했다. 신고를 한 것은 어떻게든 알려지고, 할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것도 알게 될 테고 신고 후, 보복에 대해서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매일 밤 울면서 보냈다. 


이런 와중에 두 번째 트랙이 동시에 진행이 된다. 내가 자대배치받고 나를 귀여워해 주던 운전병 사수의 한동기 밑에 병장이 있었다. 살랑거렸고 피부가 새하얀 선임이었는데 그 선임은 배치 첫날에 내 등 뒤로 와서 팬티만 입은 채 자신의 발딱 선 성기를 내 엉덩이에 비벼댔다. 여기까지는 신병들을 놀리는 몇 가지 중에 하나다. 하지만 이 선임을 그 정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내 팬티까지 벗겨서 자기 성기를 직접 갖다 대려고 했다. 업무가 끝나고 샤워를 할 때면 나를 기다렸다가 샤워실로 쫓아와 내 몸을 만져봐도 되냐고 물고는 답도 듣지 않고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키스해보자고 했고 내 입술 앞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넣으려고 했다.


그렇게 정도가 심해지자, 또 그 선임의 동기가 나를 데리고 피신시켰다. 그리고 똑같은 말을 했다. 신고만 하지 말아 달라고... 그러면서 저 새끼는 호모라고 했다. 당시에는 게이나 레즈비언을 호모라고 불렀다. 당시에 나는 사실 호모 같은 동성연애자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었다. 그저 나는 이 똘아이는 나에게 왜 이러나 싶었다. 그냥 정신이상자라고 생각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동성연애자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다. 제대 후에 얻은 첫 번째 영화 사무실에서 나에게 친절하게 일을 알려주고 함께 전국을 돌며 로케이션 헌팅을 하며 챙겨주었던 조감독 형도 게이였다. 나는 게이가 문제가 아니라 당시 그 게이병장이 사람이 좋지 못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 부디 오해 없길 바란다. 


그렇게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갔고 운전병 사수의 제대날이 다가왔다. 제대 전날 전 중대원이 모여서 롤링페이퍼도 쓰고 전역선물도 기증하는 등의 이벤트를 했다. 나는 이등병으로 침상의 제일 끝에서 두 번째에 앉아 있었다. 사회를 보던 상병이 그 사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했고 형식적인 인사말을 했다.


취침등을 소등하고 모두 잠자리에 들고 나서 그 사수는 나에게 와서 손을 잡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고 군대라는 곳, 사회라는 곳이 이런 곳이라고 했다. 웃긴 것은 당시에 그의 나이 24세였다. 새파란 놈이 사회 운운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악감정이 있다면 다 풀었으면 좋겠다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거기서 폭풍 오열을 했다. 그 사람이 제대하는 것이 좋아서, 그 사람이 미워서, 속이 후련해서. 이런 감정이 아니고 그냥 울음이 터졌다. 소등된 내무실은 나의 울음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행정반에 있던 간부도 와보지 않았다. 모두들 알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죽도록 힘든 3개월을 살고 있었는지.


디피의 대사처럼 아무도 막아주지 않았고 도와주지 않았다. 스스로 돕거나 살려고 할 수도 없었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는 경기도이긴 해도 후방부대여서 그랬는지 보초가 들고 가는 탄창에는 공포탄만 있었다. 혹시 그때 나도 실탄을 지급받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을 해본다. 잘 모르겠다.


이제 난 군대를 제대한 지 25년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면서 군대를 잘 다녀왔다고 생각한다. 외동아들로 세상물정 모르던 내가 정말 말 그대로 맞으면서 얻은 것이 있다. 받은 대로 돌려줘라? 아니다. 그 고통을 아는 이가 동아줄을 끊어야 한다. 맞는 건 내 선에서 끝을 냈다. 그 병장들이 모두 제대하고 나도 일병이 되었다. 나는 속된 말로 풀린 군번이다. 우리 중대에 100명 남짓한 중대원이 있었고 내가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 40명이 병장이었다. 그 사람들이 내가 일병 5호봉쯤에 모두 제대를 했다 상병 1호봉에 나는 중대 왕고가 됐다. 


내가 왕고가 되고 나서 점호시간은 항상 웃는 시간으로 바꿨다. 지금은 그렇다고 들었는데 중대원들끼리 369나 왕게임 같은 놀이를 하면서 보냈다. 내가 청소에 솔선수범을 보이자 내 밑으로는 자동으로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제대 하는 날, 후임들에게 받은 익명의 롤링페이퍼에서는 단 한 단어의 욕설이나 비방글이 없었고 100% 좋은 글로만 채웠다. 그 페이퍼가 지금 어디 있는지 없어져서 아쉽다. 


나는 군대에서 사람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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