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알못 딸램이 2개월 만에 원서 200권 읽기까지
‘영어는 무조건 어릴 때 노출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영유’로 불리는 한 달 원비 200만 원의 유아 영어학원 열풍으로 모자라 영어태교까지 만들어냈다. 이런 기형적인 현상을 보고 노암 촘스키 (Noam Chomsky)는 한국인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최근에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는 태아 영어학습법이 성행하고 있다. … 인간은 하늘의 최대 선물인 신비로운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동기와 환경을 만들어주기만 하면 언어능력은 저절로 작동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에서 영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동기와 환경이라는 연료를 끊임없이 부여받는 것이 중요하다. 시기는 9~10세가 효과적이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 촘스키가 누구냐면, 영유나 영어태교 업체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꼭 끌어들이는 사람이다. ‘결정적 시기’를 주장하는 생득주의 이론에서 중요한 개념인, 가상의 ‘선천적 언어습득장치 LAD (Language Acquisition Device)’를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촘스키다. 웃기게도 촘스키는 위 인터뷰에서 ‘LAD는 어느 시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언어 습득의 효과적인 시기는 만 9~10세, 즉 한국 나이로는 10세 이후’라고 말한 것이다.
결정적 시기는 가설일 뿐
조기영어교육을 주장하는 영유나 업체들이 LAD와 세트로 들고 나오는 ‘결정적 시기’는 미국의 에릭 레너버그(Eric Lenneberg)가 주장한 가설로,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특정 시기가 있는데, 이 시기를 지나면 언어를 배우기가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 가설에 기반하여 촘스키는 LAD 개념을 만든 것이다. 일단 짚고 갈 것이, 이것은 가설이고 나온 지 60년이 넘었다는 것이다. 가설이라는 건 ‘이럴지도 모른다’는,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는 생각이다. 60년간 정론으로 확립되지 않고 가설로 계속해서 남아있는 이유는 60년 동안 수많은 과학적 연구를 통해 그 가설을 반박하는 결과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캐나다 앨라배마 대에서 제2언어 습득을 연구하는 제임스 플레게 교수는 2005년에 캐나다로 와서 영어를 배운 탈북민 부모와 자녀들을 연구한 결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국어 언어 학습에서 보이는 성인과 아동의 차이가 ‘결정적 시기’ 때문에 생긴다는 가설과 일치하지 않는다.”
비슷한 연구로 미국 스탠퍼드 대학 겐지 하쿠다 교수의 연구가 있다. 그는 중국과 스페인계 이민자의 이민 시기별 영어 능력을 조사하고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논문을 통해 “일정 시기를 지나 언어 학습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결정적 시기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라고 밝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언어 습득 능력은 나이가 들수록 신체능력이 떨어지듯 완만하게 줄어드는 것이다.
캐나다 맥길 대학 프레드 기니시 교수가 한 연구도 결과는 비슷했다. 그 역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로 이민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결과는 어른이 되어 이민한 사람의 1/3이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것을 바탕으로 결정적 시기 가설을 반박했다. 그는 다른 연구에서 ‘가정의 경제력, 인지 능력, 교육 정도’ 등의 사회적 요인이 외국어 습득에서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접하느냐가 아니라 노출량의 정도!
이민자 연구를 통해 결정적 시기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했던 켄지 교수도 프레드 기니시 교수의 주장처럼 “제2외국어 습득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 경제적 요인, 특히 정규 교육의 양이 이민자가 영어를 얼마나 잘 배우는지”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같은 논문에서 주장했다. 이는 제2외국어 습득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이른 나이에 언어를 접했느냐’가 아니라 ‘노출량’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아이일수록 언어를 빨리 배운다고 오해하는 이유는, 이민을 간 사람들을 봤을 때 아이들이 부모들보다 훨씬 빨리 언어를 배우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부모보다 언어를 빨리 배우는 건 당연하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거의 하루 종일 그 언어를 쓰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른들은 언어를 배우고 쓰는 시간이 아이들에 비해 현저히 적다. 결국 노출량의 차이에 의해 습득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두 달 전 미국에 있을 때 조카와 동생을 관찰한 결과도 이와 같았다. 조카는 학교에서 보내는 아침 8시부터 클럽활동이 끝나는 5시까지 영어만 사용했다. 그러나 동생이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채 15분도 안되었다. 서울의 유명 사립대를 졸업한 동생은 미국 오기 전 영국에서 9개월간 대학과정을 공부할 정도로 영어실력을 갖추었지만 5년이 지난 현재 조카가 훨씬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노출량의 절대적인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뉴욕 시립대학 지셀라 시아 교수는 아예 ‘결정적 시기 가설’ 대신에 ‘주요 사용 언어 교체 가설’을 주장한다.
모국어 습득 과정 연구를 바탕으로 나온 결정적 시기 가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결정적 시기’ 가설은 모국어 습득과정을 연구하면서 세워진 가설이라는 것이다.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한국처럼 영어를 학교나 학원 등 에서 제한된 시간에만 접하는 환경)의 비 영어권 국가들에선 적용이 안 되는 가설이다.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인 이병민 교수는 결정적 시기 가설이 EFL 환경에서 입증된 연구는 아직까지 하나도 없었다고 단언한다. 이런 사실들을 영유나 업계에서 말해 줄 리 없다. 이것 말고도 하나 더 알려주지 않는 게 있는데, 결정적 시기 가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사례로 ‘지니’의 사례를 언급하지만 그 마저도 아이가 결정적 시기 때문에 언어를 배우지 못한 게 아니라 뇌에 문제가 있어서 언어를 배우지 못한 것으로 후에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는 것이다.
무조건 어릴 때 노출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신념 -피해자는 둘 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 폴 톰슨 교수는 핵자기공명영상장치를 이용해 3살부터 15살까지 어린이 뇌의 성장 과정을 4년 동안 추적해 뇌 성장 지도를 2000년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어린이는 3세부터 6세 사이에는 전두엽이 발달하고 6세에서 13세까지는 두뇌의 성장이 앞부분에서 점차 언어를 관장하는 뒷부분으로 옮겨간다. 이 결과에 의하면 한국 나이로 초등학교 이전에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언어를 관장하는 부분은 7세 이후에나 발달하기 때문이다. 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는 “단어 능력은 뇌의 측두엽이 발달하는 초등학교 때, 언어의 논리성은 초등학교 2∼3학년이 넘어야 터득한다”라고 말한다.
중앙대 영어교육과 김혜영 교수는 “우리나라와 같은 환경에서는 4-5세 이전에 배운 영어는 대부분 다 잊어버립니다. 오히려 너무 일찍 시작한 영어 때문에 아이와 부모 모두 지치기만 할 뿐이죠. 부모가 불안해서 영어 노래나 동화를 들려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어에 친밀감을 갖게 하는 효과 정도지, 영어 실력으로 쌓일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조언한다.
영어교육전문가인 홍현주 박사(한국외대 언어학)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겨우 짝짜꿍이나 할 때부터 영어에 매진해도 초등 2~3학년 정도가 되면, 이전에 영어 공부에 매달리지 않은 아이들이 단기간에 그 공부한 양을 따라잡습니다. 얼마 이득도 못 보는 장사에 아이들만 괴롭히는 격이지요. 영어에 일찍 노출시켜 자연스럽게 배우게 하는 목적이라도, 굳이 짝짜꿍 시절부터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에도 한 번 썼지만, 태교부터 아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열심히 영어를 들려줘서 얻은 결과물이 고작 3학년 때 영어 시작한 아이가 1주일 만에 따라잡는 거라면 얼마나 허탈한가. 엄마의 소중한 시간이 그만큼 비효율적 쓰인 거니까. 돌아다니겠다는 두 살 배기 아이를 굳이 끌어다 앉히는 실랑이를 하면서 영어책을 읽어주려던 또 다른 아이 엄마의 모습은 참 안쓰럽고도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조기교육을 주장하는 학원들은 사실 알고 있다. 4-5살에 시작한 아이나 1학년에 시작한 아이나 얼마 뒤에 같은 반에서 만난다는 것을 말이다. 그걸 알려주면 굳이 엄마들이 어린애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고, 괜히 아이들만 그 사이에서 스트레스받으며 괴로울 뿐이다.
재밌는 사실은 결정적 가설을 주장하는 교수들의 “그런데 말이야..”하면서 덧붙이는 말들이 결정적 가설과 상반된다는 것이다. 결정적 시기 가설의 창시자 레너버그는 “사람은 40세 이후에도 의사소통하는 것을 충분히 배울 수 있다.”라고 했고, 역시 결정적 시기 가설에 동의하는 시티 뉴욕 대학의 마크 패트코스키 교수는 “EFL 교육 환경에서는 아주 어린 학습자들을 대상으로 한 외국어 프로그램은 큰 효과가 없다. 외국어는 조금 더 늦게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했다. 덧붙여 “예를 들어 일주일에 몇 시간 정도 수업을 받는 경우, 10~12살 정도에 시작한 아이들이 더 빨리 따라잡는다”라고 말했다.
결국 어릴 때 해주어야 하는 것은 한글책 읽어주기
적어도 만 7세 이상에서 영어교육을 시키는 게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면 그 전엔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정서적 교감, 인성교육과 함께 한글책 읽기다. 세계적인 뇌과학자로 알려진 서유천 가천대 뇌과학원장은 “3~6세에 두뇌는 사고와 인성을 관장하는 전두엽에서 급격하게 신경 회로가 발달한다”며 영유아 시기에 중요한 것은 과도한 학습이 아닌 정서 교감과 인성교육을 강조한다. 굳이 학습 부담을 느낀다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는 아이가 학습효과 좋은 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니 학습을 위한 선행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정서 교감에 집중하시라고 하겠다. (쿨럭;;;)
한글책을 많이 읽히는 것의 중요성은 이미 쓴 글들에서 이야기했다. 앞에서도 언급한 캐나다 맥길 대학의 프레드 교수는 캐나다 이민자 아이들을 연구한 결과“모국어가 영어 습득을 촉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한글로 된 그림책을 아이와 함께 읽는 것으로 정서교감과 인성교육을 겸할 수도 있다. 두 아이를 집에서 영어독서와 음원 노출 등을 활용해 영어를 가르쳤다는 엄마이자 30년 경력의 영어 교사의 말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제 아이들을 키우면서, 또 30여 년 영어 관련 일을 하고 특히 아이들을 많이 가르쳐본 경험으로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요, 영어는 모국어 능력과 비례하게 되어 있어요. 국어능력이 높아야 영어능력도 높아질 수 있다는 거예요. 폭넓은 독서를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게 정말 정말 중요합니다. 다양하고 폭넓은 (한국어) 지식을 바탕으로 사고하는 힘을 길러줘야 그게 결국 영어능력으로도 이어져요.”
참고 논문 및 도서
RETHINKING EARLY CHILDHOOD EDUCATION for English Language Learners: THE ROLE OF LANGUAGE (Fred Genesee, 2015)
Degree of foreign accent in English sentences produced by Korean children and adults (James Flege, 2006)
Affective, cognitive and social factors in second-language acquisition (Fred Genesee, 1976)
How Language are learned (Lightbrown & Spada, Oxford university press)
Second Language Acquisition (Rod Ellis, Oxford university press)
아깝다, 영어 헛고생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