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민 교사가 말하는 영유에 관한 진실
한국에서 10년 넘게 살아온 미국인 친구 A가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가기 전에 같이 밥 먹자고 만났는데, 얼굴 본 지 좀 되어서 만나자마자 근황을 전하는 가운데 이 친구와 아는 또 다른 미국인 B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B가 결혼했다고?”
“어, 네가 아는 한국인 ㄱ이랑. 그리고 지금 영어학원에서 어린애들 가르쳐. ‘영어유치원’(정식 명칭이 아닌 이유로 이하 영유로 기재)이라고 하는 학원 있잖아.”
“그렇구나. 어떻대?”
“일한 지 한 달 되었을 때 일하는 거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슬프다고 대답하더라.”
"(고개를 끄덕이며) 그만둬야 해. 진짜 (영유) 최악이야.”
현재 영유 교사로 일하는 A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슬프다고 했다. 놀고 싶지만 못 놀고 장시간 앉아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안쓰러워서 그렇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다 생략하고 나는 A에게 그저 “She said she felt sad.”라고만 이야기했으나 A는 단번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너도 영유에서 일해본 적 있어?”
“8개월 정도 일했는데 정말 싫었어.”
“왜?”
친구는 옆에 앉아 있던 자신의 만 3세 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어린) 애들을 몇 시간씩 앉혀놓고 글자 읽는 법, 쓰는 법을 가르쳐. 20분도 집중하기 어려워하는 어린애들한테 말이야. 생각해봐, 이런 애들한테 몇십 분씩 앉혀놓고 그런 걸 가르치는 게 당연한 거야? 그것도 이해도 못하는 언어로? 그게 자연스러운 거냐고. ”
영유의 본래 명칭은 유아 영어학원이다. 유아 대상 영어학원은 유아교육법에 따라 설립된 정식 유치원이 아니다. 유아를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사설학원일 뿐이다. 교육부에서는 영어유치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적발하고 있지만, 학원들은 엄마들을 속이기 위해 벌금 따윈 마다하지 않고 유치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엄마들은 유치원이라는 말 앞에 학습에 대한 죄책감을 버린다. 만 3살부터 학원 보낸다고 하면 주위에서 곱게 보지 않겠지만, 유치원 보낸다고 하면 당연하게 보이니까.
하루 종일 애들에게 학습을 시킨다는 이야기에 “정말 하루 종일 그런 건 아닐 거 아니냐”라고 묻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음. 쭉 공부하다가 잠깐 놀고, 다시 공부하다가 밥 먹고, 다시 공부하다가 잠깐 간식 먹어.”
놀이 중심 영유가 있다고들 하지만, 대치동에서 제일 인기 많다는 P 학원 과정을 들여다보면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를 비롯한 교재가 37권에 달하고 (한국일보 기사: 다 깨서 울고 대화 거부… “영어유치원 싫어요”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701192017226611) 하루의 절반이 훌쩍 넘는 시간이 파닉스, 읽기 등의 학습시간으로 짜여 있다. 이런데도 과연 놀이 중심이 가능할까?
친구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했다.
“교사들도 정말 너무 아니야. 진짜 애들한테 못되게 굴어. 애들이 공부에 집중하지 않으면 때리기까지 해.”
정말 그 정도냐고 했더니 “부모들이 원하는 성과를 내려면 어쩔 수 없어서, 부모들이 그렇게 원하기도 해서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영유가 유치원일 수 없는 이유는 유아교육법에 따라 정식 설립된 학교가 아니고, 교사 또한 유치원 정교사, 보육교사 자격증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교사 자질 논란이 있다. 원어민의 경우는 인성 논란이 많아서 초등학교나 중학교 원어민 교사 자질을 파악하고 판단하여 파견하는 기관과 인력이 따로 있을 정도다. 유아의 발달과 관련 교육에 대한 지식이 없는 원어민도 허다하다. ( (저 잠깐 영어유치원 교사였습니다 https://www.82cook.com/entiz/read.php?bn=35&num=558915&page=17673) 앞에서 이야기 한 B도 대학에서 교육과 전혀 관련없는 전공을 했다. 실제로 작년에 같이 영어캠프 커리큘럼을 짜는데 내가 다 교안(Lesson Plan)을 샘플로 짜주고 참고해서 다른 교안을 준비해오라고 했을 때 자기는 이런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 친구가 지금 영유에서 원어민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전일제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 (그 친구의 자질을 비하하는 건 아니다. 그 친구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교육과는 전혀 무관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원어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담 교사가 되는 일반적인 상황을 설명하려는 것뿐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실 교사의 자질도, 커리큘럼도 아니라 아이들에게 미치는 정서적 영향이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한참 영유가 유행일 때 영유 열 곳이 생기면 소아정신과 한 곳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유명 소아정신과 의사가 팟캐스트에서 이야기했다가 업계 종사자들에게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엄청 공격을 받았다는데, 최근에 그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그 조사에서는 소아정신과 전문의 70%가 조기 영어교육에 부정적인 의견을 냈고 특히 가장 적합하지 않은 교육 형태로 영유를 꼽았다(영유 10곳이 생기면 소아정신과 1곳이 생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85090).
소아청소년 정신과 교수의 사교육 시간과 우울증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연구에서도 ‘사교육 받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울증상을 보이는 비율도 높아지는’ 결과를 보여주었고, 최근 신문 기사에서도 학원가가 많은 5개 구의 미성년 정신과 기록이 많다는 것과 그 지역 소아정신과 환자 50-60%가 사교육에 의한 스트레스로 인해 오는 미성년자라는 것을 언급했다. 영유 역시 유아영어학원임을 생각하면 결과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우울증을 부르는 사교육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4/03/2017040300108.html).
조기 영어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우울증 뿐만 아니라 문제행동도 더 많이 보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2011년에 진행된 한 연구에 따르면 영유를 다니는 아이들이 ‘비난 공격 상황에 처함, 불안과 좌절감 경험함, 자존감 상함’을 방과 후 영어학원을 다니는 아이들보다 더 많이 경험하는데, 특히 ‘좌절감을 경험함’ 항목에서 그 차이가 훨씬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국어로 이야기할 수도 없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학습을 해야 하는데 좌절감이 안 생길까. 좌절감이 높으니 우울증이 생기는 게 당연할 수밖에.
창의력에도 문제가 생긴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국무총리 산하 국책 연구소인 육아정책연구소가 5세 유아 및 초등학생 270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사교육의 양이 증가할수록 아이의 창의성이 떨어졌다(사교육 많이 한 아이, 창의력 더 떨어지더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18/2017031800149.html).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이기숙 교수가 진행한 연구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먼저 배운 아이가 행복할까 http://enfant.designhouse.co.kr/magazine/type2view.php?num=71876&dable=30.50.3). 웬만한 건 다 기계가 해주는 AI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창의성 밖에 없다는데 영유 관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답할까?
이 글을 쓰면서 여러 논문과 기사를 검색하는 중에 가장 충격적으로 와 닿은 말은 서유헌 가천대 뇌과학 연구원장의 말이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가늘고 엉성하게 연결된 전선에 과도한 전류를 흘려보내면 불타버리죠? 어릴 때 과잉 사교육도 마찬가지예요. 뇌신경에 불을 내는 셈이죠."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18/2017031800151.html)
서 원장은 “"3~6세 유치원 때에 초등학교 과정을 선행 학습하면 그 시기에 발달해야 하는 전두엽에 악영향을 끼친다. 이 시기에는 창의·인성을 길러주고 동기를 유발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전두엽 장애는 주의 집중 저하와 동기 결여로 이어지고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원인이 된다. 주의가 산만하고 충동적으로 변해 인성과 창의성도 떨어진다. 3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멸망한 것도 전두엽이 발달하지 못해서였다.”라고 말한다(전에 내가 <영어유치원 이래도 보내시겠어요? https://brunch.co.kr/@urholy/16에 비슷한 내용을 썼을 때 근거 없는 자기 생각이라며 열폭했던 님들 많았는데, 여기 근거 있으니 사과하라고 하고 싶다ㅎㅎ).
영유를 고민하는 부모라면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할 아이의 두뇌를 어릴 때 망가뜨리면서까지 영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정말 생각해보면 좋겠다. 이렇게 말해도 보낼 사람들은 보낼 거라는 거 알고 있다. 강의 들으러 오신 분 중에 조카가 자녀 교육 때문에 대치동으로 이사 갔는데 1년 반 만에 아이에게 틱이 왔다고 하시면서도 본인 손주를 영유 보내야 하나 고민하시는 분이 계시다. 위험요소가 보이고 주변에서 경험을 하더라도 정작 본인의 문제가 되면 “나에게 그런 일은 안 일어나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의 모습이니 말이다. 난 돈 많고 자기 확신 있어서 영유 보내는 사람들까지 설득한 열의는 없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경제적으로도 여유 없는데 남들이 다 보내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보내야만 한다는, 확신은 없는 사람들에게 영유 따위 안 보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쓰는 것뿐이다.
폭발적인 조회수를 자랑했던, 그리고 영유 원장님들에게 엄청난 댓글 폭격을 받았던 나의 글 <영어유치원, 이래도 보내시겠어요?>의 댓글에 보면 자신을 영유 교사라고 하며 글을 다신 분이 있다. 그분은 일하는 곳에서 본인 자녀를 무료로 공부시켜준다는 제안을 거절했다고 하며 “영유 교사는 자신의 아이를 영유에 보내지 않는다.”는 나의 말에 같은 말로 지지했다. 그 분만이 아니라, 영유 교사였던 내 친구들이 그랬고, A와 B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많은 엄마들이 영유 효과를 궁금해하고 검색해서 내 브런치에까지 도달한다. 내 강의에 오시는 분들이 하는 질문에도 늘 영유를 보내야 할지를 묻는 질문이 있다. 내 대답은 명확하다.
"낮아도 너무 낮은 가성비에, 심하면 되돌리기 힘들 정도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두시고 판단하세요."
참고 논문:
홍은자 외(2001) 유아의 학원·학습지 이용 실태에 따른 스트레스 정도 연구
신의진(2002) 조기 교육과 발달 병리적 문제: 한국 조기 교육의 현황과 과제
박영 양 외(2004) 과외활동(학원, 학습지 등 모든 사교육 총칭) 정도에 따른 유아의 스트레스 정도 연구
백혜정 외(2005) 유아의 사교육 수, 시작 시기, 소요시간과 사회정서적 문제행동과의 관계 연구
우남희(2007) 유아의 영어교육 경험과 지능, 창의성과의 관계 연구
조미영 외 (2009) 교사의 조기 영어교육 필요성 인식과 교사가 느끼는 문제점 분석
송정은 외(2010) 사교육 시간에 따른 외현화 문제와 내면화 문제의 성별 차이 연구
홍현주 (2011) 사교육 시간과 우울증의 관계 연구
김형재(2011). 조기 영어교육 경험에 따른 유아의 한국어 어휘력, 실행기능, 스트레스 및 문제행동의 차이
최지영 외(2012) 취학 전 교육기관 유형에 따른 학교 초기 적응 차이 연구
이윤진 외(2014) 유아기 영어교육의 적절성에 관한 연구
이정림 외(2015) 유아 사교육 실태와 개선 방안: 조기 외국어 교육 효과를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