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가 아니라 물을 마시고 싶어.
언젠가 영화 음악 만들기 수업을 알림 신청해두었는데 수업이 열렸다고 문자가 왔다.
큰 프로젝트를 앞두고 바빠지기 시작하는 시기라 병행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는데 흥미로워서 일단 신청했다.
그러고 며칠 뒤 퇴근길에 알라딘에 들려 책 구경을 하다 영화 관련된 책들이 눈에 밟혀 촬영 감독 인터뷰 책과 각 분야별 영화 스태프 인터뷰 책을 샀다. 집으로 돌아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18살 덜컥 연기부에 들었던 순간, 시나리오 쓰고 싶다고 오발탄 사이트에서 시나리오를 뒤적거리던 날들, 점심시간마다 원더월 클래스에서 영화 관련 촬영과 컬러그레이딩 강의를 들었던 시간들, 사람인/잡코리아 말고 필름메이커스 구인구직란에 기웃거리며 포트폴리오를 올렸던 날들.
참 오래전부터 영화를 동경하고 있네,라는 생각을 하던 중 핸드폰 알림이 와 열어보니 영화제작팀의 촬영 파트 제안 메일이었다.
일하며 병행이 가능할까? 싶었고 물음표인 상태로 우선 부분 참여해 보기로 했다. 작년 가을, 사이드 프로젝트로 창작자 지원을 위해 배우 프로필 촬영을 시작했던 게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심어놓았던 씨앗들이 이제야 고개를 드는 게 아닐까.
이렇게 삶이 영화계로 흘러가게 되려나 싶었으나,
작년 가을부터 올해 초, 아트북 만들기와 사진집 만들기 클래스에 참여했었고 수업을 통해 내가 어떤 걸 표현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게 됐다.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손에 잡히는 형태로 만들었을 때의 기쁨을 느꼈다.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참에 때마침 클래스를 진행하셨던 영민 작가님의 독립출판 아트북 워크숍이 열렸다.
어, 이건 해야겠는데?
나 책 내야 하는데.
거기에 클래스 101에서 클래스를 만들어보자며 제안을 해왔다. 요즘에 크리에이터를 많이 모집하고 있는 듯 보였고 누구에게나 열린 기회 같아서 보류하기로 했다.
이 모든 걸 병행할 수는 없었다.
영화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있었지만 업의 특성상 많은 사람과 교류하고 소통해야 하며, 수많은 사람들과 하나의 결과물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과연 나와 맞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소통에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모되어 혼자 작업하는 걸 선호하는데, 영화 제작은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할 것 같았고 모든 걸 쏟아부어도 모자를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내가 영화를 한다면? 이런 고민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질문에 답하다 보니 내려진 결론은 단순했다.
영화를 찍고 싶은 게 아니라,
‘영화 같은 삶을 살며, 삶을 기록하고 영화적 미감으로 표현’하고 싶은 거였구나.
여기서 영화 같은 삶이란 연출된 삶이 아닌, 내가 포커싱 한 것들을 다양한 프레임에 담아내는 삶을 뜻한다.
일을 하며 예술 하기는 어렵지만, 삶 자체를 예술로 승화하면 된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태도가 곧 표현이고, 나는 삶의 태도를 기록하는 예술가인 셈이다.
그렇게 나는 영화 음악 만들기 수업을 취소하고, 영화 제작팀에도 빠졌다. 독립출판 워크숍과 필라테스를 등록했다.
지금 내게 더 필요한 게 뭔지,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나눠쓸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었다.
삶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고,
이번 선택을 통해 내가 무엇을 붙잡고 싶은지 명확해졌음을 느꼈다.
아주 오래전부터 빌었고, 새해 첫날 도선사에서 할머니에게 빌고, 소원지에도 썼던 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게 해주세요.”였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고 싶냐 묻는다면,
늘 그렇듯, 여행하며 기록하고 싶다 말할 것이다.
왜 그러고 싶은지 생각해 보니 그 일이 좋아서라기보다 좋아하는 상태로 있을 수 있어서였다.
내가 어떤 상태를 좋아하는지 생각해 봤다.
1. 낯에 햇빛 보기
2. 주도적으로 행동하기
3. 좋아하는 장소에 가서 몰입하기 (독서, 글쓰기, 편집 등)
4. 자연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
5. 스스로를 대견하다 생각하고 다독이기
당장은 전부 충족하며 살아갈 수 없으니,
적어도 이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하루에 배치해 보기로 했다.
하루에 한순간만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상태로 머무를 수 있도록.
여태 일하며 버티는 시간과, 그만두고 자유로워지는 시간을 ‘똑’하고 나눠 생각해왔다. 그러니 자꾸만 그만두고 자유를 향해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실 일은 수단이고 목적은 상태였는데.
이 과정을 거치며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다는 표현이 떠올랐다. 내게 필요한 건 오아시스가 아니라 갈증을 해결해 줄 물이다. 목마를 걱정 없는 상태, 생존이 위협받지 않는 상태를 찾아 헤맨 게 아닐까.
일을 하면서도 좋아하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만들어가는 게 올해의 목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