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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어린 Apr 29. 2023

사랑을 탐구하는 산달에게

지리산에서 보내는 펜팔 (3) - 덕복희의 대한 편지

산달! 답신을 고대했노라고 점잖게 전할 작정이었어요. 편지를 보자마자 홀라당 읽어내려갔다가, 눈을 감아도 문장이 아나운서의 프롬프터처럼 동동 떠다니도록 수차례 다시 보았답니다. 어찌나 기뻤는지 앞니가 다 건조해졌느니, 꼭지점댄스를 출 뻔했느니 덧붙이다가, 적다보니 글이 주접스러워 그만 체통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제 예상과는 달리 썩 고상하게 답신을 읽은 모양새는 아니었으나 무척 기뻤다는 말이어요.


산달이 ‘Sandal wood’였다니! 신년에 친구에게 인센스를 선물 받았어요. ‘포트메리온’ 접시를 ‘포토샵’이라고 부르는 엄마와 닮은 저라면, 한번 듣고 곧장 잊어버릴 어려운 이름의 향들이었답니다. 그중 제가 딱 기억하는 것이 바로 산달우드였어요. 향을 잘 아는 친구에게 이건 어떤 향인지 설명을 구할 정도로 기억에 남았지요. 그때 왜 산달을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산달의 편지를 받고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요. 향 이름만큼이나 향 냄새도 좀체 구분하지 못하는 제가 산달우드만은 꼭 기억하게 되길 바라요.


산달의 편지는 꼭 어린시절 읽던 잡지 귀퉁이에 적힌 낱말 퀴즈 해답지 같았어요. 특히 ‘기후운동은 어쩌면 기다리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라는 문장에서는 엉덩이를 걷어차인 것처럼 눈이 번쩍 뜨였어요. 마치 “인생은 왜 이리 고통스럽습니까!”하는 제자들에게 “인생은 원래 고해다!”라고 설파하는 싯다르타의 법문처럼 들렸답니다. “환경운동은 왜 이리 수신자가 없이 고독합니까!”하는 저에게 “기후운동은 원래 기다림이다!”라는 말이었으니까요.


지구가 저를 기다려준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지금은 부족하지만 더 지구답게 살아가도록 인내해주신다고요. 자식을 천 번 만 번 가르치는 어머니처럼요. 어미늑대는 어린 자식에게 처음엔 음식을 토해서 준다고 해요. 당신이 반쯤은 소화시켜서 주는 거죠. 식사를 물어다주는 일이 천 번 반복되고 나면 이젠 사냥법을 천 번... 이토록 친절한 커리큘럼이 있을까요? 지구가 제게도 똑같이 그러고 계시겠죠? 산달의 말마따나, 제가 그 특훈을 경청하고, 수집하고, 마침내 번역할 수 있도록요.


지난 편지에서 ‘못말리는 돈벌레’를 이야기했었죠. 전 어릴 적부터 늘 벌레를 혐오했어요. 이사를 해마다 다녀서 거친 집이 많거든요. 어찌나 싫은 기억이 강렬했는지 저는 ‘불개미가 모퉁이마다 있던 집’, ‘주먹만한 바퀴벌레가 날아다니던 집’ 등으로 집의 역사를 기억해요. 돌이켜보면 벌레는 언제나 반려자였으면서도 언제나 박멸의 대상이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요? 길가의 비둘기에게 더는 욕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어깨에 올라온 거미를 세게 밀쳐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언제부턴가 지구가 상냥함을 제게 가르쳐준 거예요.


벌레는 반려고양이랑 다를 게 없다고요. 벌레를 죽이지 말고, 지긋이 관찰해보라고요. 그들은 한밤중 별안간 불빛에 침범 당했을 때조차 고요함을 지킬 줄 알아요. 제 발걸음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숨죽이는 솜씨 좋은 은닉자에요. 살충제 따위로 누를 수 없는 한겨울 배추같은 생명력도 있고요. 지리산에 오니 반려벌레가 다양해졌어요. 지네, 곱등이, 콩벌레, 노래기 등등… 지은 업이 많아서인지, 지금의 제게 벌레라는 종족은 유난히 애틋해요.


물론 아직 벌레와 악수할 만큼 친하지는 않지만, 제법 그들이 귀엽게 보여요. 단 지네만큼은 아직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발바닥만한 지네가 성큼 집에 들어왔을 때 꼭 지네가 제게 장풍이라도 쏜 것처럼 놀라 나자빠졌답니다. 시골에 오래 산 사람치고 지네에 안물려봤다는 사람을 못만났어요. 너무 공포스럽죠? 다행히 전 아직 지네에 안물려봤는데, 지네에 물린다면 아마 ‘성인식’처럼 ‘촌인식’을 무사히 마쳤다고도 볼 수 있겠어요. 그땐 꼭 축하해주세요(?). 저는 지네의 깜찍함마저 발견하는 법을 연습하고 있을게요.


아아, 산달! 혹시 이게 사랑일까요? 저는 ‘사랑은 어떤 걸까요?’하는 산달의 물음에 한동안 어름거렸어요. 매일 아침 고구마를 우물거리면서, 창밖의 쌓인 눈을 구경하면서, 고양이와 난로 앞을 지키면서, 재차 떠올렸지만 뾰족한 답을 몰랐거든요. 지금 편지를 쓰자, 목욕탕에서 벌떡 일어나는 아르키메데스처럼 돌연 답이 튀어나온 것 같아요. 천 번의 기다림 속에는, 다정함과 희망과 강인함과 상상력이 있잖아요! 저를 향한 지구의 기다림이 느껴질 적마다 명치에 성냥불 하나만한 따뜻함이 생기거든요. 제가 벌레에게 굴어온 무례를 꾹 참고 끈질기게 천 번 만 번 알려주었잖아요. 지구가 그토록 아끼시는 벌레를 우리집에 또 다시 보내주었잖아요. 그걸 사랑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지구처럼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겠어요. 다음 편지가 올 쯤이면 열흘은 흐른 후일 거예요. 그때의 산달은 “사랑의 새로운 길을 찾았어요!”하고 말을 걸까요? 아니면 새로운 화두에 몰두하고 있으려나요? 산달의 반려생물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다음 편지까지 꼼짝없이 저는 소한의 편지에 머물러요. ‘음…’, ‘뭔가…’라며 말을 고르는 습관을 가진 사람을,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입을 꾹 붙이고 선 사람을, 그런 사람이 거듭 다듬어낸 문장의 무게를 돌아봐요. 오래 손 안에 쥐어 미지근해진 조약돌 같은 온도를 떠올려요.


대한의 편지를 보채고 싶지만, 저도 산달처럼 차분하게 바로보면서 산달의 세계를 만나볼게요. 가을에 담근 밤조림을 세 달 꾹 참고 겨울에 맛보는 마음으로, 기다림 속에서 비로소 숙성되는 산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게요. 자신의 편지를 기다리느냐고 물었죠? 몹시 기다려요. 그러니 다음 편지까지 명랑한 나날들 보내세요!


목욕탕에서 벌떡 일어난 덕복희 올림


p.s. 새파란 잠자리는 벼가 호박빛으로 물드는 초가을 논둑길에 마지막 남는 푸른빛이에요. 여름색 옷으로 경의를 표하며, 여름이 무사히 떠나도록 마차를 준비하는 기사랍니다. 지리산에선 참새만큼 흔한데, 서울에선 ‘밀잠자리’를 만나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어요. 올 여름 산달이 지리산에 온다면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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