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인류학 쓰기 1.
얼마 전 학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는 고등학교 후배와 통화를 하면서 사회학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눈 적이 있다. 나와 그는 지역도 공부의 맥락도 많이 다르지만 사회학 공부라는 경험 속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했다. 둘 다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눈치를 더 많이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 의심이 많아졌다. 대화를 할 때에도 말을 고르는 시간이 늘어났고, 글을 쓰고 나서는 이 글을 솔직하게 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늘 남았다. 불안과 강박은 늘어났고, 그것은 내 안에서 맴돌고 고여 우울이 되었다.
나는 학부에 다니는 내내 사회학 공부와 불화했다. 사회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4년 가량의 시간 동안 하게 되는 훈련은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어떠한 사회적 관계의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를 바라보는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와 구조에 대한 다종다양한 이론들을 배울수록, 이 세계의 문제를 만들어낸 구조의 복잡함을 알아갈수록 학생으로서 나는 스스로가 점점 무기력을 체화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나는 후배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회학은 ‘사회’라는 구조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것에는 탁월하지만 그럴수록 그 구조는 공고하게 느껴지고, 그 구조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나라는 개인은 더 무력해지는 것 같아.”
나는 나의 무력함의 탈출구를 찾다 인류학을 만나게 되었다. 언젠가는 “‘구조적 문제’라는 표현이 ‘문제의 겹을 들추면서 재빨리 책임을 면피할 수 있게’ 한다”는 조문영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조문영, 2021; 406). 고등학교 후배는 자신이 “앎과 삶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했는데, 어쩌면 그와 같은 사람들이 겪는 우울의 이유가 사회학에서 모호하게 얼버무리고 지나가버리는 ‘책임’의 의무를 혼자 다 짊어지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화기 너머 후배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자연스레 그가 진 짊을 가볍게 해주고 싶다는 바램을 갖게 되었고, 그러려면 이 ‘책임의 문제’를 분명하게 정리해내야 했다.
공장식 축산과 기후위기 문제로 사회운동을 시작하며 만난 여러 동료들과도 이 우울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많았다. 사회학과 졸업논문을 쓰면서 나는 ‘기후우울’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가 겪고 있는 공통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정이어린, 2025). 내게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과 세계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아직 내게는 섣부르게 사회를 분석적인 언어보다 일상과 세계를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언어와 글쓰기가 필요했다. 거리를 두고 사회라는 연구 대상을 바라보는 사회학적 접근보다 참여를 통해 “사람 속에서 사람과 함께하는(잉골드, 2020; 13)” 인류학의 겸손함에 내가 끌린 이유다.
그렇게 나는 졸업하자마자 홀린 듯이 생태인류학 강의에 청강 신청 메일을 보냈고, 지금 이 글은 그 수업의 첫 번째 에세이 과제이다. 이번에 읽은 세 개의 읽기 자료는 생태인류학의 학사적 맥락과 최근 연구에서 다루어지는 쟁점들에 대한 글이다. 먼저 가장 가볍게, 하지만 가장 생생하게 읽을 수 있었던 글은 “‘에코그래피’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류학자들”이라는 제목의 2022년 스톡홀름 대학교 인류학과 라운드 테이블의 녹음된 대화였다.
인류학은 그 기원에서부터 낯선 민족의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참여관찰, 한국에서는 민족지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에스노그라피를 방법론으로 삼는다. 이때 ‘에코그라피’란, 인간 사회의 개념을 확장하여 사회가 더 넓은 관계망(eco) 속에 얽혀 있음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는 용도로 제기된 단어이다. 개념이 아니라 단어라고 말한 이유는 인류학자들이 이 단어를 엄밀하고 고정된 개념이기보다는 “행성적 변화의 시대에 인류학의 실천”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인류학은 사실 애초에 생태적 관계를 바라보는 데에 주목했으나 진화론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시스템적 사고’와 거리를 두었지만 사실 언제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존재론적 전환’ 또는 ‘인간-너머’의 접근 또한 아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예전에 한 동료와 최근 대두되는 신유물론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신유물론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이론’으로서 국내 연구에서 활용되는 양상에 대해서는 고민이 된다고 말했다. 그때 화두가 되었던 건 신유물론을 통해 본 제주 해녀의 존재방식에 대한 논문이었는데, 이 글에서도 지적하듯 “경험적이고 체화된 암묵적 지식의 포착”이라는 측면에서 훌륭했지만 “앎에 대한 노력이 때로 덜 명백한 형태의 추출 및 착취와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저 묘사(graphy)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섬세하지 못한 묘사는 너무나도 쉽게 자본주의적 경관과 존재방식을 낭만화하기가 쉽다. 에코그라피 방법론은 또한 이런 점에서 묘사에서 그쳐서는 안 되며, 그러한 묘사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어떤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지 또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지점에 대해서 다른 두 글에서 심도 깊게 논의하고 있다. “교차적 생태학: 인류학과 환경을 다시 상상하기”라는 글에서는 생태인류학에 대한 여러 논문들을 검토하면서 교차적 생태학을 통해 ‘환경’을 지속적으로 역사화하자고 연구자들의 연합과 협력을 촉구한다. “환경 인류학: 시스템적 관점들”이라는 논문은 인류학이 언제나 자연-문화의 이분법에서 자연에 가까운 쪽을 탐구해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인류학 분과 내에서의 생태연구의 흐름을 살핀다. 이 검토에서 흥미로웠던 지점 또한 관계적 흐름 속을 살피면서 인류학의 이름으로 수행하고 있는 행위가 정치적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기민하게 주의를 살핀다는 것이다.
최근 특정 장 내에서 급증하는 생태에 대한 관심은 복잡다단한 관계와 문제상황 속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지워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공통적인 혼란스러움을 나타내는 것 같다. 책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절망하지 않기 위함이다. 단단한 역사적 흐름 위에 발을 딛고 희망의 가능성을 꿈꾸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생태인류학 공부를 시작해본다.
참고문헌
정이어린. 2025. 기후우울과 함께 세계를 다시 사랑하기.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학사졸업논문.
조문영. 2021. 행위자-네트워크-이론과 비판인류학의 대화: ‘사회’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비교문화연구, 27(1), 393-445. 10.17249/CCS.2021.06.27.1.393
팀 잉골드. 김지윤 옮김. 2020. 팀 잉골드의 인류학 강의. 프롬북스.
흑흑... 강의 시작 2분 전에 제출했다. 원래 36시간 지각. 교수님께서 이러면 앞으로 청강 못 듣는다고 경고하셨다... 앞으로는 제일 먼저 우선순위로 잘 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