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에 너는 나를 노래하라
한 민족이 대제국인 애굽의 압제로부터 벗어났던 그 역사가, 그 민족에서 태어난 한 남자아이가 36살 지금의 나보다 어린 어느 날에 십자가 위에서 죽고 다시 부활한 그 사건이, 2022년 한국의 땅을 밟고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일상과 과연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 수 있을까.
멈추어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일상에 파묻혀 결코 보이지 않을 실타래다.
최근 청년들과 인생 영화를 논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쇼생크 탈출(1995)>을 꼽았다. 귀 따갑게 내리치는 비 한가운데 하늘을 향해 가슴을 열며 포효하는 한 남자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것 같은 포스터가 생각난다면, 맞다. 바로 그 영화다. 교도소 내 모든 물건을 구해주는 ‘레드(모건 프리먼 分)’의 시선에서 기록한 아내와 그 애인을 살해한 억울한 혐의로 종신형을 받고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된 ‘앤디(팀 로빈슨 分)’의 쇼생크 교도소 탈출기. 2시간 20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앤디를 응원하며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앤디가 온몸을 다해 살아내고 지켜낸 ‘희망’과 ‘자유’의 가치에 가슴 절절히 매료되었기 때문이리라.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단연코 앤디가 교도소 사무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 스피커를 통해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틀은 장면. 교도소 내 가장 무서운 형벌이라는 독방형을 각오하면서 오페라를 틀은 그 몇 분간, 모두가 숨을 죽이고 멈췄다. 앤디를 사무실에서 끌어내기 위해 문을 내리치는 교도관들을 제외하고 교도소 운동장을 까맣게 채운 사람들 모두가, 침대에 무료하게 누워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멈췄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의 오페라가 흘러나오는 스피커에 시선과 귀를 고정했다. 그 찰나의 순간, 이들은 모두 어떤 꿈을 꿨을까. 아, 나는 멍하니 하늘 위 스피커를 올려다보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서 마음속 깊이 숨겨놓았지만 결국 감옥의 창살을 넘어 들어온 ‘희망’과 ‘자유’의 빛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전율했다. 그 빛 속에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단 하나의 예술로 이 원대한 역사를 이어가고 계신 진정한 예술가가 나를 향해 조용히 건네는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를 닮은 어여쁜 자야, 너는 나의 노래다.
인사하는 너의 목소리로, 그림을 그리는 너의 붓으로, 침대를 정리하는 너의 손길로, 아이들과 마주하는 너의 눈빛으로, 식사를 준비하는 너의 프라이팬으로, 낯선 이에게 베푸는 너의 대가 없는 선의로, 막막함 속에 흘리는 너의 눈물로, 탄식조차 안 나오는 순간의 너의 깊은 침묵으로.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잠이 드는 밤까지, 그 모든 순간에 너는 나를 노래하라.
우리가 삶으로 노래할 때 분주한 발걸음을 옮기던 누군가의 시선이 멈춰질 것이다. 감옥 안에서 잠이 든 것처럼 살아가는 이들 안에 창조주가 깊숙하게 숨겨놓았던 어떤 열망이 건드려지게 될 것이다. 그들이 숨을 죽이고 우리의 노래에 조용히 집중하게 되는 그때, 유일무이한 창조주가 작사 작곡한 노래를 결국 듣게 되는 그때.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희망’과 ‘자유’가 주는 아름다움의 찰나를 맛보게 될 때. 그 순간의 정적 속에서 태초부터 2022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오늘까지 하나의 바늘에 엮은 예술가의 경이로운 미소를 드디어 목격하게 될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떤 노래를 갈망했나. 보배합은 세상을 향해 어떤 노래를 불렀나. 독방형을 각오하고 ‘희망’과 ‘자유’의 노래를 틀은 앤디의 간절함이 나의 창조주, 나의 하나님을 노래하는 우리의 지금에 묻어나기를 더없이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