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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Apr 30. 2022

007. Niche (n) 꼭 맞는 자리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세상 안에서 경험한 딱 그만큼만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가.


마치 나의 정체성에 대한 해갈이 바로 이 질문에 걸려있는 것처럼 그렇게 매달렸다. 앞자리가 4였던, 내 인생 최저 몸무게를 찍었던 그때. (참고로 나의 키는 169cm이다.) 바로 그때 즈음일 것이다. 모든 것이 애매했고, 억울했고, 원망스러웠던, 끊임없이 소금물을 들이켜 마시는 것처럼 갈증이 해소가 안 되던 그때. 바닥이 보이지 않는 불안의 근거를 장래 희망의 부재에 두었던 그때. 장래 희망(將來希望). 장차 하고자 하는 일이나 직업에 대한 희망.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이에게 희망하는 직업을 물어보는 것이 얼마나 우매한 일인지. 나의 심신이 곯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더없이 선명하게 느꼈던 것이 있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속으로 기어코 외면한 질문들처럼 말이다. 숨만 내뱉으면 콸콸 쏟아져 나올 문자와 질문들을 목 아프게 꿀꺽 삼켜버린 순간들. 이 말을 왜 그렇게 이해하나요? 왜 나에게 이런 말과 행동을 하나요? 왜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밖에 소통하지 않나요? 왜 당신은 당신의 기준으로만 나를 대하나요? 당신은 왜 세상을 그렇게 해석하나요? 왜 나의 마음을 묻지 않나요? 나는 왜 당신과 이렇게도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건가요? 괜히 나까지 나서서 상황을 악화시킬 필요는 없었다. 젓가락, 숟가락이 식기와 부딪치는 소리만 어색하게 들리는 십여 분의 시간 동안, 적막을 견뎌내지 못하는 이의 불안을 온 피부로 고스란히 느끼며 나는 그렇게 밥과 함께 말을 삼켰다. 그렇게 지켜낸 테이블이 쌓여갈수록 몸무게는 계속 줄었다. 소화를 못 했던 것이 밥이었는지 마음이었는지.


타인은 힘겨운 지옥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언제나 고독을 뚫고 나오게 하는 것 또한 타인의 존재다. ... ‘우리’가 되면 내게 일어난 많은 일은 내게만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된다. 한때 혼자서만 슬퍼했던 경험이 공통의 경험이 된다. 거기서 나는 내가 아닌 척할 필요가 없다. ... 거기서 내가 누군가를 환영한다면 나 자신도 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혼자일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저마다의 숨겨진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단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 나누고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타인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나누는 것이 치유인 이유는 내가 존재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정혜윤 p228-229 


각 사람의 인생에 주어지는 고통의 깊이는 오로지 창조주와 개인, 그 둘만이 알 수 있는 철저히 사적인 영역일 것이다. 하지만 깨지고, 어긋나고, 부서지고, 문드러지는 인생의 고된 여정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일어나리라. 솔로몬이라고, 그리고 나라고 다를까. 그렇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더도 덜도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세상 안에서 경험한 딱 그만큼만 타인을 진실되게 포용하는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말이다. 우리가 삶으로 경험한 그만큼 타인에게 나누어볼 용기를 얻어가는 대화의 자리를 열고, 지키는 것이 말이다. 환대를 받았던 자가 환대를 할 수 있다면, 용서를 받았던 자가 용서를 할 수 있다면, 사랑을 받았던 자가 사랑을 줄 수 있다면. 슬픔이 변화되어 찬양이 될 수 있다면. 길가에 장미꽃에도, 장미 가시에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하리라.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서른여섯 번째 오월을 보내고 있는 지금의 나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어떤 자리를 지켜내야 하는지는 매우 분명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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