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gancia Jan 12. 2021

수상한 이웃집 냄새.

끔찍한 기억의 재생

작년 12월부터 아파트 엘리베이터 공사가 한창이었다. 전염병과 추위로 문밖을 나가는 일이 예전보다 줄었지만 나는 계단 오르기 운동을 하는지라 하루에도 몇 번씩 계단을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천천히 발을 옮기다 보면 이웃의 현관문을 뚫고 나오는 소리를 원치 않게 듣게 될 때가 있다. 특히나 요즘처럼 '아동학대' 뉴스가 매일 쏟아져 나오는 때, 계단에 울리는 아이 울음소리는 저절로 귀를 쫑긋거리게 만들었다. 소리가 멈추었을 때에야 계단을 오르던 발의 속도를 높였다.


2주 전쯤이었을까? 평소처럼 운동화 끈을 묶고 현관을 나섰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이웃들을 자주 마주쳤지만 그날따라 통로는 내가 내딛는 발소리만 살짝 울릴 뿐이었다. 8층에서 9층 즈음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이상한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왔다. 스치고 지났다면 약재를 다리는 냄새인가 하고 지나갔을 터인데 점점 진해지는 냄새에 온몸이 굳어졌다. 

'헉 그 냄새야.'


어린 시절,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있는 시골 집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우리 가족은 살고 있었다. 동네에서도 가장 큰 단감나무가 마당에 자라서였을까, 마을 분들은 우리 집을 단감나무집이라 불렸다. 대문 대신 어른 허리 높이만큼의 돌담이 둘려있어 누구나 쉽게 마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집 뒤편으로 계단식 밭들이 있었는데 그곳에 가시는 어른들은 꼭 우리 집 단감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잠시 산들바람에 느끼다 내려가셨다. 쉼의 대가로 평상 옆에는 온갖 작물들이 놓여 있었는데 우리 가족에겐 맛있는 저녁 반찬이 되곤 했다.


우리 집과 가장 가까운 아랫집에는 허리가 반쯤 굽은 할머니께서 혼자 살고 계셨다. 그 집에는 어른 키보다 훨씬 큰 앵두나무가 있어 앵두가 열리는 계절에 할머니께서는 하얀 사기그릇에 빨간 열매를 가득 담아 평상 옆에 두고 가셨다. 그래서 나는 그 할머니를 앵두 할머니라는 애칭으로 불러드렸었다. 그맘때 앵두 할머니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손녀가 내려와 며칠 지내다 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도시에서 사는 부모님께서 방학기간 동안 조부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가신 게 아닌가 싶다. 


나는 그 아이를 기다리며 가끔 담 너머 앵두 할머니 집을 건너다보았다. 내가 기다렸던 건 그 아이가 들고 왔던 책가방 때문이었다. 그 가방 안에는 '쥬쥬와 미미' 같은 tv 광고로만 보던 예쁜 인형들이 한가득이었으니까... 장난감이 거의 없이 지내던 내가 그 아이가 오면 역할 놀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두른 거렸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 아이대로 나와는 다른 설렘을 가지고 우리 집에 뛰어왔다.


평상 아래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강아지 두 마리, 감나무 뒤편에서 키우던 닭과 병아리들, 그 옆에 하얀 토끼 두 마리, 길고양이였지만 늘 우리 집 마루에서 나른하게 잠든 노란 고양이를 그 아이는 좋아했다. 미니 동물원에 온 그 아이는 내게 인형들을 빌려주고 동물들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언니~ 저 고양이 이름은 뭐야? 언니 집에서 키우는 애야?"

"아~ 그냥 우리 엄마는 '나비야~'라고 불러. 엄마가 챙겨 주니까 언제부터인가 왔는데~ 너무 귀엽지? 만져도 괜찮아."

"나도 강아지 고양이 키우고 싶다. 언니 부럽다... 아~ 내일 우리 할머니 집에 와 고기 삶아주신데. 올 거지?"


평소 담장 너머로만 보던 그 집에 아이가 있어 처음으로 들어가 보았다. 돼지고기를 삶으셨나 싶어 할머니 집 대문을 열었는데 고기를 삶는 냄새가 태어나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무슨 고기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마루에 걸터앉았다. 잠시 후 앵두 할머니는 기억자로 굽은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커다란 쟁반을 내 오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에서는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할머니 이거 무슨 고기예요? 냄새가 이상해요. 혹시 개고기예요? 개고기면 저 안 먹을래요."

"이거 개고기 아니여. 없어서 못 먹는 거여. 우리 애는 잘 먹던디."


무슨 고기인데 이런 냄새가 날까 싶었다. 할머니가 발라주는 고기를 거부감 없이 받아먹던 아이는 내게 왜 먹지 않냐고 물어왔지만 비위가 약했던 나는 코를 막고서 아이의 입만 쳐다봤다. 몇 번 입에 대주며 권하던 앵두 할머니의 손도 내 고집에 포기를 하신 건지 혼잣말을 자꾸 뱉어내셨다.


"이거 없어서 못 먹는 거라니까..."


아이와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오늘 보았던 정체불명의 고기와 냄새에 기분이 바닥이었다. 이틀 후 아이는 부모님이 계시는 곳으로 갔고 나도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이의 부재에도 가끔 앵두나무집에서 정체 모를 냄새가 퍼졌다.


"엄마~ 앵두 할머니 집에서 이상한 냄새나죠? 나 저 냄새 너무 싫은데..."

"글쎄. 약 냄새 같던데~ 뭔지 엄마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요 며칠  나비가 집에 안 오지?"

"아 맞다. 나비가 안 보이네. 내일 내가 찾아볼게요."


학교를 마치고 나비를 찾아 동네 골목골목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나비는 보이지 않았다. 거의 매일 자기 집 마냥 우리 집에 다녔던 아이에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혹시 몰라 집 뒤편 밭으로 가는 길 푹 파인 곳에서 나는 절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야 말았다. 보송보송 인형처럼 생긴 털 뭉치 두 개가 나란히 포개져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피가 묻어져 있는 고양이의 두 발이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뛰어나올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울며 아빠에게 고양이 발을 보았노라 말씀드렸다.


"누가 고양이 죽였나 봐요. 어떻게 해. 우리 나비 발이면 어떻게~"

"고양이가 관절염에 좋다고 그런 말은 들었는데... 아빠가 한번 가볼게"

"아빠~ 앵두 할머니가 먹었나 봐. 우리 고양이 먹었나 봐. 흐앙~"


그 후 나는 며칠을 악몽에 시달렸다. 담을 너머 내가 맡았던 냄새는 분명 고양이 탕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앵두 할머니께 넌지시 물어보니 길고양이를 동네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잡아 약으로 드셨노라고 말씀하셨단다. 그것도 8마리나... 우리 집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잡아다 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엄마는 내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지만 나는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는지 그 아이가 놀러를 왔는데도 아프다는 핑계로 만나지 않았다. '네가 먹은 그 고기가 고양이야. 네가 그렇게 우리 집에 와서 예뻐했던 고양이를 너희 할머니가 먹어버렸어. 그래서 나는 할머니가 너무 미워'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 아이와 나의 마지막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병으로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아이도 더 이상 오지 않았으니까... 앵두 할머니 집에서 올라오던 냄새와 빨간 피가 묻은 고양이 발은 내게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겨졌다. 


계단을 오르던 발이 9층에서 8층으로 8층에서 7층으로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집에 들어와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헛구역질이 나와 입덧했을 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다시 재연했다. 거의 30년이 흐른 지금도 고양이를 잡아 약으로 먹는 사람들이 있을까? 위를 진정시키고 책상에 앉아 검색에 들어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동의보감>에서 고양이의 특유의 관절 유연성 때문에 관절염의 치료 목적으로 약으로 먹었다는 것을... 고양이 매매 자체가 불법이 아니기에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아 아직도 건강원에서는 나비탕, 묘탕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된다는 것을...


하지만 과학적으로 약효는 검증되지 않았다. 워낙 도축하기 쉽지 않은 녀석이라 잡아서 산 채로 끓는 물에 넣거나 잔인하게 죽인다는 내용을 보고 나는 검색창을 손가락으로 날려버렸다. 생각하기도 싫었던 끔찍한 기억들이 재생되어 밥도 잘 먹지 못했다. 내가 계단에서 맡았던 그 냄새가 그때 그것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과 현실 사이에서 나는 한동안 멘붕이었다. 


어린날의 트라우마 속에서 나를 구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더 길고양이들에게 마음이 쓰였는지도 모른다. 길고양이의 얼어버린 물그릇에 얼음을 버리고 새 물을 떠다 주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고양이가 물그릇으로 다가와 작은 혀를 할짝거렸다. 순간 어린날 우리 집 마당을 도도하게 걸어 들어오던 나비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할머니를 미워하는 마음도 나를 찾아왔던 그 아이를 돌려보낸 미안함도 나비를 잃은 슬픔에 비하면 먼지와도 같았다. '미안해 나비야 나는 너를 지켜주지 못했어.' 어린 시절 나비에게 말하지 못한 인사를 너무 늦게 나는 길고양이의 뒷모습을 보며 전하고 있었다. 

https://brunch.co.kr/@uriol9l/157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 말고 내일 죽으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