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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Jan 05. 2021

오늘 말고 내일 죽으련다.

작년 초, 외할머니의 절친한 친구 두 분이 돌아가셨다. 3년 전만 해도 할머니 댁에 가면 도란도란 거실에 앉아 고구마를 삶아 드시던 그분들의 모습이 나는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오래오래 건강하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한 분은 지병으로 반년 간 요양병원에서...  다른 한 분은 교통사고 후 수술 후유증으로 그렇게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나셨다. 


친구들이 떠나고 가족들이 더 자주 할머니를 찾아뵙고 챙겨드렸지만 벗의 빈자리를 채우기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의 팔과 다리는 점점 살가죽 안에 텅 빈 뼈들만 만져졌다. 자주 비틀거리다 쓰러지셨고, 신체의 일부가 된 지팡이를 4번이나 잊어버릴 때 즈음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조용히 지우개 두어 개를 머릿속에 숨겨두셨다는 것을... 


- 왜 전화를 하고 끊어버리냐~

- 할머니 저 전화 안 했어요. 

- 아니여~ 딱 찍혔당께. 했다니까~ 와서 확인 좀 해봐라 내가 거짓말하나. 

- 알겠어요. 저 이것만 하고 갈게요. 기다리셔요.


10분 후 

- 왜 전화해서 말을 안 하냐 너는!!

- 저 전화 안 했어요. 할머니. 제가 많이 보고 싶으셨구나. 저 지금 가요.


할머니 집에 급하게 슬리퍼를 신고 달려가 보니 휴대전화에는 발신 전화만 가득했다. 걸려온 전화는 없었다. 

"핸드폰이 이상하네 할머니. 서비스센터 가봐야겠어요."

"아이고. 서비스센터 가기 전에 내가 어서 죽어야된디. 빨리 죽어야 편해지는디."


3개월 전부터 할머니께서는 "죽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처음엔 코로나 블루가 할머니에게도 영향을 미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에 10번이고 20번이고 전화로 "죽고 싶다"라고 말씀을 하시니 내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친정엄마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할머니 왜 그러실까? 전화로 자꾸 죽고 싶다고만 하셔. 눈물도 많아지셨고..."

"있어봐. 엄마가 알아서 할게"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할머니께 전화를 거셨다. 내가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폰 버튼을 눌러주셔서 나는 엄마 곁에서 두분의 통화를 조용히 들을 수 있었다. 


친정엄마 : 엄마~ 많이 힘들어? 어째 손녀한테 죽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도 했는가~

할머니 : 죽을 때가 되었응께 글지야. 오늘이라도 죽을 수 있으면 당장이라도 죽을란다.

친정엄마 : 엄마. 나도 왜 내가 아등바등 지금 살고 있는지 모르겠네. 오늘 내가 다 정리하고 엄마 집으로 갈 테니까 같이 죽읍시다. 엄마 혼자 춥고 외롭게 나는 절대 못 보내.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도 애들한테 당부할 건 이야기하고 가야 하니까... 하아... 1시간이면 될 테니 기다리고 계셔요. 

할머니 : ... 


평소 밝고 명랑한 친정엄마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장난으로 하는 말씀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이야기에 할머니는 한동안 대답이 없으셨다. 깊은 한숨소리만 서로의 휴대전화를 통해 전달될 뿐이었다. 두 분의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내 가슴이 울컥하여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칠 남매의 맏이인 엄마와 할머니의 나이차이는 나와 엄마의 나이차와 비슷하다. 앞으로 20년 후 내가 엄마와 이런 대화를 하게 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수화기 저편에서 한숨만 들려오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할머니 : 오늘 말고 내일 죽을란다. 네가 정리할게 오죽 많겄냐~ 내일 온나. 

친정엄마 : 우리 엄마. 나는 엄마가 곁에 계신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 엄마는 죽으면 편하겠지. 그런데 아들딸들은 얼마나 가슴 아프겠는가~ "죽어야지 죽어야지" 말고, "살아야지 살아야지"로 바꿔보소. 내가 내일 꽈악 안아줄랑께. 엄마 좋아하는 팥죽 만들어갈까요?

할머니 : 그냥 온나. 알았응께


세상의 3개의 거짓말이 있다고 한다. 1.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 2. 처녀가 시집 안 간다. 3. 노인들이 빨리 죽어야지. 장사꾼이 하는 말은 상술이고, 처녀의 말은 반어법이라면, 노인의 거짓말은 관심이 필요하다는 표현이 아닐까? 자주 찾아뵙고 말벗이 되어드리려 했지만 할머니의 외로움의 깊이에 비하면 내 관심과 사랑이 부족했음을 또 한 번 느꼈다. 할머니의 삶의 모래시계가 얼마나 남았을까? 작년에 비해 올해 더 모래가 떨어지는 속도도 남은 양도 적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다음날 친정 엄마께서 끊여오신 팥죽을 들고서 함께 할머니 댁을 찾았다. 그리고 뼈 마디마디가 만져지는 할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할머니의 느리고 약한 심장의 두근거림이 느껴질 때까지...  할머니의 외로움을 내 따뜻함으로 덮어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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