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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Jul 08. 2021

할머니의 빈 집

나흘째 비가 내린다. 시원한 장대비가 보슬비와 이슬비로 이름만 바뀔 뿐 '장마는 장마구나'싶다. 멈추지 않는 비를 보고 있으면 온몸에 이끼를 뒤집어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쩍쩍 달라붙는 방바닥에 두 다리를 내려놓고 눅눅한 소파 매트에 앉아 베란다 창문으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바라본다. 다행히 이동식 테이블에 올려놓은 따뜻한 커피 향이 이 우울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상쇄시켜 준다.




어제 제주에 계시는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아픈 막내 이모와 통화를 하고 싶은데 벌써 몇 주째 이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대신 간호를 해주는 큰이모들과 할머니를 통해서 이모의 상태를 전해 들었다. 걷지 못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있거나 가끔씩 앉아있으면서 시간을 보낸단다. 환자에게 비는 기분뿐 아니라 몸도 아프게 한다고 들었는데, 어서 장마가 지나가고 볕이 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집에는 가 봤냐? 어쩌디?"

"할머니 집은 잘 있어요. 집이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한번 가봐야 된다... 이모가 저러고 있으니 갈 수가 있어야지."

"제가 가끔 들여다보고 있어요. 걱정 마셔요."


할머니께서는 나와 통화할 때마다 빈집을 걱정하신다. 작년 초 가을에 제주에 가셨으니 몇 달 후면 집을 비운 지 1년이 되어간다. 엘리베이터 공사가 끝나면 바로 오신다고 하셨는데... 갈 때까지만 해도 막내 이모의 몸 상태를 전혀 모르고 가셨기에 간단한 짐만 가지고 가셨던 할머니. 이모의 몸 상태가 악화되면서 자식을 두고 올 수 없다고 하셨다. 허리가 굽어 몸도 아프신데 마음까지 얼마나 힘드실까? 매일 눈물로 기도만 하고 계실 것 같아 할머니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코끝이 시큰거린다.


일주일, 늦어도 열흘에 한 번은 할머니의 집에 갔다. 할머니께서 계실 때는 나지 않던 냄새들이 집을 점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불쾌한 냄새에 앞뒤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아끼던 화초에 물을 듬뿍 주고서 소파에 앉아 있다 보면 금방이라도 뒷베란다에서 할머니께서 "고구마 쪄 묵고 갈래?" 하며 나오실 것만 같다. 옷을 좋아하시는 우리 할머니, 음식을 잘 하시는 우리 할머니, 이웃에게 많이 베푸시는 우리 할머니, 보고 싶은 우리 할머니.


"할머니 집은 잘 있어요. 환기도 시켰고, 화초에 물도 줬어요."

"잘했다. 우리 손주도 잘 지내지? 얼마나 컸을꼬... 보고 싶다."

"저희 가족도 할머니 많이 보고 싶어요."


할머니께서 이 집에 언제 오실지 기약이 없다. 다만 돌아오시는 이유가 이모의 부재가 될까 봐 나는 오시라는 말을 쉽게 입 밖으로 내지 못한다. 대신 할머니께서 오실 때까지 집이 쓸쓸하지 않도록 잠시 머물다 나온다. 언젠가 이 집에 할머니께서 오실 때 내가 쌓아 놓은 그리움이 할머니를 안아줄 수 있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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