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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Nov 05. 2021

백발 할머니와 코스모스

마지막 사진 속 기억.


아들을 등교시키고 조용한 방에서 책장을 훑었다. 특정한 책을 찾기보다 하릴없이 아래서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굴렸다. 평소 지나쳤던 가장 아래 칸에 낡은 사진첩이 오늘따라 눈길을 끌었다. 사진첩을 꺼내 거실로 자리를 옮겨 소파에 앉아 한 장씩 넘겨보았다. 내가 탯줄을 달고 세상의 빛을 본 날부터 20대 초반까지의 성장 기록이 촘촘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양 갈레 머리를 땋고 앉아 있는 소풍 단체 사진을 보며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마지막 페이지가 가까워질 무렵 페이지를 넘기던 손길을 멈췄다. 코스모스 갓길에서 백발 할머니와 찍은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기억 저편으로 잊혀 있던 파란 하늘과 바람에 흔들리던 꽃들 그리고 그 앞에서 밝게 웃으시던 할머니의 모습들이 하나씩 어제 일처럼 재생되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주말이면 나는 부모님을 따라 봉사활동을 다녔다. 그날 찾은 곳은 연로하신 분들이 계시는 복지관이었는데, 그곳에서 한 할머니를 처음 뵈었다. 130센티 정도의 작은 키에 깡마른 체형, 하얀 니트 원피스를 깔끔하게 입고 허리를 꼿꼿하게 편 모습이 편한 복장의 다른 할머니들과는 다르게 인상적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총명함이 눈빛에 서려 누구라고 한 할머니를 만나면 뇌리에 깊게 남을 수밖에 없는 분이셨다.



"할머니. 이렇게 작은 글씨가 보이셔요?"

"그럼. 내가 책 보려고 눈 수술도 했어."



할머니에 손에 들려있는 책 속 글자는 젊은 사람이 읽기에도 쉽지 않아 보였지만 할머니는 돋보기도 끼지 않고 독서를 즐기는 분이셨다. 외국에 사는 아들 내외와 수도권에 있는 딸이 보고 싶지만 뚝 떨어져 혼자 지방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할머니. 다른 할머니들과 잘 어울리시다가도 한 번씩 뚝 떨어져서 책을 읽는 모습에 이를 보며 나도 저렇게 나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역설적이게도 할머니를 볼 때마다 '작은 거인'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여름의 끝자락을 넘기고 주변이 가을로 물들어 갔던 주말. 그날은 봉사활동을 하던 분들이 어르신들을 모시고 야유회를 가는 날이었다. 미니버스 두 대를 빌려 탔는데, 한 할머니는 1호 차 가장 뒷자리에 앉으셨다. 조금 늦게 합류한 나는 할머니의 옆자리에 타고 싶었지만 이미 1호 차에 자리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버스를 따라가는 승용차에 탈 수밖에 없었다. 도시를 벗어나 교외에 들어선 지 얼마나 되었을까? 코스모스 길이 쫙 펼쳐진 도로가 나오면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여기에서 사진 찍으면 예술이겠네."

"할머니들 사진 찍어드리면 좋아하시겠어요"



앞서가던 버스가 멈추고 하나둘 사람들이 나와 사진을 찍기 시작했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한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유난히 꽃을 좋아하시는 할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신가?' 1호 차에 올라 뒷자리에 할머니를 찾았다.



"사진 안 찍고 왜 여기 계세요."

"나는 사진 찍는 거 안 좋아해. 짜리 몽땅해서 보기도 그렇고. 빨리 나가서 사진 찍어."

"혼자 찍기 그러시면 저랑 같이 찍어요. 네? 제가 같이 찍고 싶어서 그래요."


할머니는 마지못해 내 손이 이끄는 대로 버스에서 내리셨다. 몇 번이나 다시 버스에 들어가려고 하셨지만 그땐 내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음... 할머니 서서 찍기 그러시면 저랑 앉아서 찍어요." 할머니는 마지못해 웃으시며 내 앞에서 자리를 잡으셨다. 내 손을 꼭 잡는 손길에 그분의 마음이 전해져 나도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나는 야유회를 다녀와 2주 동안 감기 몸살 때문에 복지관에 가지 못한 터라 엄마를 통해서 할머니와 찍은 사진을 받았다. '한 할머니께서도 같은 사진을 보며 미소 지으셨겠구나' 빨리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일 때문에 복지관에 몇 주 늦게 갈 수밖에 없었고, 내가 갔을 때는 한 할머니께서 따님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 후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코스모스 길 앞에서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다른 할머니들께 매일매일 자랑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아려왔다. 그때는 한 할머니와 찍은 이 한 장의 사진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오래오래 건강하시라는 이별의 말도 전하지 못했는데...




2~3년이 흐른 것 같다. 한 할머니께서 치매 전문 병원으로 옮기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책을 사랑하시는 분이셨는데 기억이 지워질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마음 같아서는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왜 그러지 못했을까? 나는 할머니와 사진을 찍었던 그날처럼 적극성을 나타내지 못했다. 한 할머니께서 눈을 감으신 후에야 '깊은 후회'로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분과 내 나이 차이는 70살. 하지만 사진 속 할머니는 나와 비슷해 보인다. 아니 소녀처럼 웃는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한 할머니는 내게 소중한 가르침을 주고 떠나신 분이다. 연로하신 분들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보다 더 빨리 가는 시계를 몸속에 품고 계시다는 것. 더 소중하고 더 가치 있게 어른들과 보내는 시간을 감사하게 여기며 살라는 것. 무엇보다 기회가 있을 때, 말과 행동으로 그분들께 관심을 표현하라는 것 말이다.



이번 생과 같은 생을 또 얻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이 생에서처럼, 이런 방식으로 이런 환경에서 이런 부모, 아이들, 가족과 또다시 세상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결코 다시 이런 친구들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 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지금 그들을 보러 가십시오. 

인생수업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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