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추억 속으로.
"달그락달그락" 아침마다 교문으로 향하는 책가방들이 소란스러웠다. 아이들의 발걸음에 맞춰 들리는 마찰음에 눈길이 절로 책가방을 향했다. 내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어느새 2학년 교실 앞에 다다랐지만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면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있겠지.' 책가방에서 '만능 필통'을 꺼내 자랑해 대는 꼴을 오늘도 봐야 했다. 그 무리를 피해 나는 내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이거 봐. 엄마가 사주셨다." 나를 보자마자 뒷자리에서 뛰어온 윤경이 내 앞에 필통을 불쑥 내밀었다. 핑크색 뚜껑에 프린트된 미미 인형에서 반질반질 윤이 났다. 콩알만 한 노란 버튼을 누르자 투명한 자가 스프링처럼 툭 튀어나왔다. 버튼을 차례차례 누를 때마다 지우개, 연필깎이, 작은 가위까지. 뚜껑을 열자 필통은 연필을 쉽게 뺄 수 있도록 몸을 기역 자로 굽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필통 몸을 뒤집어 열자 알록달록 스티커와 놀이를 할 수 있는 플라스틱 바늘이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진짜 좋겠다. 나도 가지고 싶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진심이 입 밖으로 쏟아졌다. 열정적으로 필통을 해부하던 윤경은 필통을 다시 원상 복귀 시키더니 교실로 들어오는 다른 친구에게 뛰어갔다. 몇 번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 책가방을 열었다. 가방 바닥에는 이모가 쓰다 내게 준 남색 필통이 교과서와 노트 사이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연필 3자루와 지우개만 넣어도 비좁은 천 필통. 필통을 꺼내지 않았다. 가방 속에서 지퍼를 열어 연필과 지우개만 꺼냈다.
일 년에 한 번 동생과 내가 기다리는 날이 있었다. 생일도 어린이날도 아니었다. 그날은 바로 직업군인이었던 삼촌이 우리 집에 오는 날. 대문 밖에서부터 큰 소리로 우리를 부르던 삼촌의 양손은 언제나 무거웠다. 학교를 다니기 전에는 '종합 과자 선물 세트'를 입학 후에는 학용품이 든 꾸러미를 선물로 받았다. 노트, 색연필, 스케치북, 가위, 모양 자 등. 다음에 삼촌이 올 때는 꼭 '만능 필통'을 가져오길 나는 밤마다 눈을 꼭 감고 기도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 삼촌은 여느 때처럼 우리를 위해 선물을 한가득 들고 오셨다. 부모님과 삼촌이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나는 삼촌이 준 봉지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하나씩 조심스럽게 바닥에 꺼내 놓았다. 방바닥은 금세 몇 달은 쓰고도 남을 학용품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가지고 싶어 했던 '만능 필통'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미리 가지고 싶다고 말했으면 기꺼이 사줬을 삼촌인데...
방구석에 앉아 소리 없이 눈물만 훔쳐댔다. 집 앞 문구사에만 가도 진열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필통. 다른 친구들은 다 있지만 나만 없는 만능 필통. 부모님께 사달라고 조르지 못했다. 가난은 아이를 '벙어리'로 만들기도 하니까. 그날 저녁, 퉁퉁 부은 얼굴로 밥상 앞에 앉았다. 평소 보이지 않던 반찬들이 가득했지만 입맛 실종. 숟가락 포크로 내 밥을 덜어 삼촌의 밥그릇에 올려놓았다.
다음날 아침, 삼촌은 우리를 차에 태웠다. 차에서 내렸을 때 집 근처 문구사와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문구 도매상점이 앞에 있었다. 안에는 처음 보는 문구들이 가득했는데 교실에서 보지 못했던 필통도 보였다. 얼핏 보아도 윤경이가 가지고 있는 필통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맘에 쏙 들었다. 삼촌이 사준 필통을 들고 집에 와 방 서랍에 넣어두었다. 차마 비닐도 뜯지 못하고 며칠을 보기만 했다.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지만 겨울 방학이라 혼자 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3학년이 되고 새로운 교실에서 새로운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났다. 해가 바뀌면서 만능 필통의 인기는 시들해졌다. 더군다나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소리가 나는 필통은 수업에 방해가 되니 천 필통에 필기구를 담아 오라고 하셨다. 간절히 가지고 싶어 했던 물건을 손에 넣었지만 방에서 혼자 보고 만족해야 했던 만능 필통.
시간이 흐른 지금도 삼촌과의 대화에서 문구 도매점을 갔던 추억은 빠지지 않는다. 침묵이 모든 걸 숨기지는 못한다고 믿었다. 어른들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아이의 눈빛에서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는다고.
"삼촌 그날,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필통 때문에 울었던 거."
"어떻게 알긴. 엄마가 네가 쓴 일기 읽고 알려주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