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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May 11. 2023

호호 할머니가 된 솜뭉치.

18살 고양이에게.


일요일 오후 6시, 빨간 자동 우산을 접고 버스에 오르자 듬성듬성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빗물에 젖은 신발이 버스 바닥에 선명한 도장을 찍어댔다. 뒷바퀴 위로 툭 튀어나온 자리에 몸을 말아 넣었다. 손잡이에 끼운 우산 끝으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발 도장과 만나 추상화를 그리는 동안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말 퇴근길은 평일보다 1.5배 더 몸이 무겁다. 입맛도 저만치 달아나 집에 가면 침대와 한 몸이 되고 싶다는 마음만 간절했다. '무조건 잠부터 잘 거야.' 기사 아저씨와 내 마음이 통했는지 빗길에도 버스는 쌩쌩 차들을 피해 달렸다. 오르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거의 없어 열두 정거장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답을 듣기도 전에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엄지발가락 부분이 젖은 양말을 쭉 늘려 벗고 있을 때, 침대 위, 하얀 솜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야, 이게 뭐야?" 내 목소리에 남동생이 빼꼼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히히~ 일부러 침대 위에 뒀어. 귀엽지?" 그제야 나는 형광등 불을 켰다. 핑크색 이불 위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솜뭉치가 환한 빛에 고개들 들었다. 핑크빛이 도는 뾰족 귀는 연핑크색이었다. 에메랄드 배경에 까만 눈동자가 내 행동에 따라 미세하게 반응했다. 단잠을 자다 깼는지 앞발을 쭉 내밀어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꼭 인형 같았다. 코앞까지 다가가 손을 내밀어 녀석의 몸을 안아 들었다. 어른 주먹 두 개 정도의 크기이었지만 보송한 털을 없다면 절반도 안 될 만큼 여린 몸집이었다.


얼이 쏙 빠져 한쪽 양말만 침대에 벗어두고 녀석을 안은 채 거실로 나와 엄마를 찾았다. 피로는 이미 어딘가로 증발돼 버린 후였다. 머릿속은 온통 이 말랑말랑한 녀석에게도 집중되었다. "엄마 이 아이 뭐예요?" 안방에서 나온 엄마는 내 궁금증을 단번에 해결해 주셨다. 아는 언니가 분양을 보내려고 했는데 다른 형제들보다 몸집이 작아서 못 보내고 엄마께서 받아왔다고. 녀석은 우리 집 막내가 될 거라고. 내 발등 아래서 한 살 된 흰 푸들이 그 꼬물이를 내놓으라며 발을 모아 콩콩 뛰었다. 소파에 다시 앉아 찬찬히 다시 녀석을 살폈다.


"이름은 지었어요?"

"아빠가 장미라고 지으라 했어"


입술이 장미 빛이라 지어진 이름 장미. 초보 집사 4명과 사고뭉치 푸들을 가족으로 맞이할 거라고 녀석은 상상이나 했을까? 지금까지 쭉 반려동물을 키웠으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으리라. 다만 아빠께서 한결같이 고양이는 싫다고 말씀하셨는데 괜찮을지 의문이었다. 나와 남동생도 걱정이었다. 저녁에 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고양이를 보면 무섭다며 빽빽 소리를 질렀으니까. 그러나 우리 가족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양이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이 귀엽고 앙증맞은 생명체를 빨리 보려고 퇴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신발에 모터를 달았다. 장미는 한 번도 달려 나와 반기지 않았다. 내 방 침대에 누워 "지금 왔냐" 도도하게 나를 바라봤을 뿐. 레이저 불빛을 따라 이리저리 점프하며 우당탕탕. '먹보야. 그만 좀 먹어' 늘 푸들 언니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다가도 부스럭거리는 봉지만 보면 쏜살같이 달려와 몸을 들이밀었다. 길고 하얀 털들이 선풍기 바람을 타고 둥실 떠오르면 솜사탕이 아닌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분명 막내로 들어온 녀석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스스로 신분을 상승시키더니 어느새 아빠의 자리까지 넘봤다. 결국 집안에 왕으로 군림했다. 




7년 동안 함께 지내다 결혼 후 가끔 엄마집에 들렀지만 우리의 시간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그 무렵 장미가 출산한 딸도 아빠가 거두어 두 마리의 고양이가 각자 가정을 꾸린 남매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미와 나 사이에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손주가 태어나고 대부분 밖에서 부모님을 뵈었다. 아이의 건강과 고양이들이 스트레스받을까 봐 걱정이었다. 그날은 비도 오니 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자고 엄마께서 먼저 제안하셨다. 아이를 안고 엄마 집에 들어서자 고양이들은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덕분에 보행기를 탄 아들은 쌩쌩 거실을 질주했다.


아이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엄마와 음식을 준비를 서둘렀다. 모녀가 오랜만에 대화의 물고 가 열렸고 웃고 떠들며 야채들을 지지고 볶았다. "으앙~" 하는 울음소리가 거실 끝에서 들렸다. 놀라서 뛰어가보니 아들의 뽀얀 팔에 붉은 발톱 자국이 선명했다. 얼굴에도 발에 찍힌 자국이 보였다. 격양된 목소리로 도망간 고양이를 찾으며 이름을 불러댔다. 안방 침대 이불 밖으로 고양이 꼬리만 길게 나와있었다. 이불을 들추고 손으로 녀석의 앞발을 꽉 잡았다. "왜 그랬어? 아가 다쳤잖아."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야앙~~~~~하악" 처음엔 울던 장미가 이빨을 드러내며 하악질을 했다. 처음 보는 녀석의 찡그린 얼굴에 놀라 발을 놓쳤다. 그 틈을 타 장미는 침대 밑으로 들어가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장미가 아이의 팔이 아닌 내 심장을 긁은 것 같아 못내 서운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 아이는 움직이는 솜뭉치가 신기해 손을 가까이 가져갔을 테다. 털을 쭉 잡아당겼는지도 모른다. "하지 마. 한 번만 더 그러면 언니 아들이어도 안 봐줄 거야." 아직 말도 못 하는 아이가 고양이의 언어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 그 후 엄마 집을 방문할 때마다 고양이들은 우리를 피했다. 미안한 마음에 좋아하는 캔이며 츄르를 사주며 달래도 봤지만 아들의 모습만 보면 무섭게 하악질을 해댔다. 보이지 않는 벽은 때론 바위보다 두껍고 철보다 강하게 너와 나를 가로막았다.




"요즘 장미가 하루하루가 다르다니까. 아빠가 신경을 많이 쓰셔."

올해로 18살. 사람 나이로 90세. 호호 할머니가 된 장미는 연로한 고양이다. 전문 집사인 부모님께서 살뜰하게 보살폈으니 가능했으리라. 어버이날, 아이를 등교시키고 홀로 부모님 집에 들렀다. 집은 고요했다. 거실 소파에 천으로 된 숨숨 집 안을 보니 야윈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쌕쌕 거리는 거친 숨소리는 이따금 멈췄다 다시 가늘게 이어졌다. 고양이들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몸은 야위었어도 얼굴은 10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머리를 쓰윽 쓰다듬었다. 눈을 뜰 힘도 고개를 들 기력도 녀석에게는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호호 할머니가 다 되었네. 우리 장미, 많이 힘들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숨결이 손끝에서도 느껴졌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바쁘고 지친 몸을 위로해 주었던 내 작은 솜뭉치. 너를 키우면서 우리 가족 모두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그 하나만으로도 한없이 고맙다고. 부디 아프지 말라고 그리고 미안했다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장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나카타 씨처럼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잠시라도 좋으니 장미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녀석은 힘겹게 눈을 떴다. 나를 응시하고 눈인사를 건네는 교감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녀석의 영혼의 일부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동안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비 내리는 주말 저녁처럼.

솜뭉치를 처음 만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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