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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의 등 뒤에서 길을 배운다.

만나지 않고도 오래 이어질 수 있는 관계.

by fragancia

* 이 매거진은 Eli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은 한 사람의 등짝일지도 모릅니다.
좋은 친구, 아름다운 사람, 닮고 싶은 어떤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등.
그걸 바라보고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방향입니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병률>


Q. 이 문장을 보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시내버스 밖으로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를 오르는 사람들은 우산과 어깨에 맺힌 물방울을 툭툭 털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흘러내린 빗물이 바닥에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고,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그 물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새로운 물줄기와 합쳐졌다. 며칠 전부터 확인했던 일기예보에는 80%의 비 소식이 있었다. 나는 남은 20%에 희망을 걸었다. 비가 멈추길, 적어도 오늘만은 잦아들길 바랐다. 그러나 바람과 빗줄기는 그 희망을 허락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발걸음을 재촉했다. 축축하게 젖은 신발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차역 대합실에 들어서자 전광판부터 올려다봤다. 다행히 기차가 10분 이상 연착되었다는 표시가 켜져 있었다. 그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잠시 후, 휴대폰 화면에 그녀의 이름이 떴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낯설지 않은 뒷모습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카키색 배낭을 메고, 한 손에 휴대전화를, 다른 손에 자동 우산을 쥔 그녀. 그 순간 마음이 저릿하게 울렸다.


‘아, 저 사람이구나.’




우리는 5년 전, 팬데믹이라는 긴 고립의 시간 속에서 처음 만났다. 세상은 정지된 듯 고요했지만, 온라인은 작은 문학관이자 서재가 되어주었다. ‘108일 주 5회 글쓰기’, ‘다정한 시선’이라는 모임에 올린 글은 서로의 안부가 되어주었다. 일상을 묻지 않아도 문장 속에 스며든 기척만으로 서로가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시절 그녀는 세 아이를 키우며 시댁에서 농사일을 도왔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반짝이는 순간을 건져 올려 짧은 글로 남겼다. 그 글에는 일상에 고여 있던 우울을 살짝 흔들어 깨어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문장 속에서 어린 시절 뛰놀았던 시골의 풍경을 추억했고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씨앗 하나를 마음에 심었다.


<다정한 시선>에 올린 그녀의 사진과 글.


시간이 흐르며 모임은 사라졌고, 연락도 엷어졌다. 온라인에서 맺은 인연이 언제든 흩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름 석 자와 몇 편의 글이 내 마음에 오래 살아남아 있었다. 가끔 생각날 때면 조심스럽게 안부를 묻고, 달력이나 인상 깊게 읽은 책과 노트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이어진 가느다란 끈이 결국 우리를 빗속의 기차역까지 데려온 것이다.


서로를 확인한 순간, 우리는 오래된 친구처럼 웃었다. 택시를 타고 카페로 향하는 동안,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흘렀다. 카페엔 사람들로 붐볐지만, 벽과 책으로 막힌 곳에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글과 책, 그리고 지난 시간을 이야기했다.


다섯 시간은 5분처럼 흘러갔다. 그녀는 내가 읽지 못한 책들을 이야기했고, 나는 그녀가 잊고 지낸 단어들을 꺼냈다. 단순히 책이나 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글을 매개로 서로의 지난 시간을 비추는 일이었고, 각자의 고독 속에서 글에 의지해 살아온 날들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 만남을 통해 나는 ‘문우’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새삼 깨달았다. 문우란 단지 함께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글을 통해 서로의 삶을 증명하고, 언어로 서로를 지탱해 주는 사람이다. 이름을 길게 부르지 않아도,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통하는 관계. 학창 시절 친구들보다 글로 맺은 우정이 오히려 더 단단했다.




돌아오는 길, 빗소리가 창밖을 두드렸다. 풍경은 흘러가는데, 마음은 여전히 카페 속 대화에 머물러 있었다. 오늘의 다섯 시간이 내 안에서 오래 메아리칠 것 같았다.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자주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미 한 번의 만남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얻었으니까. 글은 우리를 계속 이어 줄 것이다. 언젠가 또 다른 기차역, 또 다른 비 오는 날, 그녀의 뒷모습을 다시 보게 되리라. 그때도 오늘처럼 마음이 저릿할까. 아마 그렇겠지.


생각해 보면, 내 삶의 방향을 알려준 건 언제나 한 사람의 ‘등’이었다. 좋은 친구의 등, 아름다운 사람의 등, 닮고 싶은 사람의 등,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등. 그녀 역시 내 인생의 한 장면에서 길을 밝혀준 등불 같은 존재다. 그녀의 등을 바라보고 따라 걸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방향을 얻었다.


<다정한 시선>에 올린 그녀의 사진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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