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하며 나누며
*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의 필사 모임에서 제공된 자료를 토대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 이 글쓰기의 목적은 필사 문장을 다시 음미하고 확장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 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바깥은 여름, (김애란) -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내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 진짜 기억이 아닐까.
20대에 나는 술을 많이 마셨다. 365일 중에서 360일을 마셨다. 마시지 않은 5일은? 아마 아팠을 것이다. 전공 필수 기말 시험이 있는 전날은 이상하게 더 많이 마셨다. 문법론이라든가, 한문학, 향가론 같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술은 왜 마셨을까. 공부하기 싫었나 보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일찍 도서관에 자리 잡고 앉아 50원 짜리 커피를 연거푸 들이켜면서 공부를 하긴 했다.(종이컵 한가득 나오는 자판기 커피가 50원이었는데 졸업할 무렵 100원으로 올라 격분했었음) 커피에서 소주맛이 났다. 전공필수 시험이 끝나면 마음이 가벼웠다. 그래서 시험이 남았는데도 또 술을 마시러 갔다. 놀랍게도 나는 F를 맞지 않았다. 자랑이다.
나를 포함한 20대의 선. 후배 술꾼들은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하나 둘, 동네 술집이나 신촌, 혹은 종로 어디쯤에서 만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우리는 같은 지역에서 살았고 성당 주일학교의 교사들이었다. 오늘은 무사히 집에 들어갈 거야, 굳은 결심을 하며 학교를 빠져나오면 나도 모르게 술집으로 향했다. 나를 술집으로 이끈 건 애마가 아니라 내 다리였으니 김유신처럼 애마를 베어버리듯 내 다리를 베어버릴 수는 없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감으로 술집을 찾아가는 거였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잘도 술집으로 모여들었다. 삐삐가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다 가지고 있진 않았는데 어떻게 모였을까.
몇 군데 연락 포인트가 있었다. 종로 지역은 종로서적과 YMCA, 신촌은 연대 앞 독다방(독수리)이었다. 그곳의 메모판이 우리의 카톡방이었다. 만일 신촌에서 모일 거라고 하면 독다방 입구의 메모판으로 가서 우리 중 누군가가 남긴 메모를 찾는다. 당시 그런 문화는 일반화되어 있어서 메모가 분실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뻔뻔하고 잔인했으며 용서할 수 없는 5 공화국의 매캐한 최루탄으로 찌든 시대였지만 메모가 지켜지는 시절이었다. 동네에서는 페리카나 치킨집, 재래시장 안의 우가네, 성당 근처 포장마차 등이었는데 그곳의 사장님들 또한 우리의 메신저였다.
집으로 가려면 신촌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그렇게 신촌에서 내리면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술꾼들을 찾아 독수리 다방으로 갔다. 독다방 입구의 메모판을 살펴보고 메모가 있으면 그리로 가고 메모가 없으면 동네 재래시장 안 "우가네"로 가는 것이다. "우가네"로 바로 가는 것도 아니고 가기 전 중간에 있는 페리카나 치킨집과 포장마차에 들러 메시지를 확인한다. 문을 열자마자 치킨집과 포차 사장님은 "아무도 안 왔어."라거나 "우가네로 가봐"라고 전해주곤 했다. 이 사장님들은 우리가 마시는 술 양에 비해 술주정을 하거나 우리끼리 싸우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우리에게 잘해 주었다. 어쩌다 외상을 해도 다음 날 바로 갚았던 우리는 얌전한 술꾼들이었다. 술버릇이 좋지 않으면 우리들 사이에 낄 수 없었다.
"우가네"는 우리의 단골집이었다. 맥주는 비싸서 못 마시고 주로 막걸리나 소주를 마셨는데 안주는 해달라는 데로 나왔다. 계란말이, 순댓국, 머리고기, 김치전이나 호박전 등이 안주였지만 늘 돈이 없었던 우리는 10명이나 몰려가서 달랑 순댓국 하나 시켜놓고 반찬만 끝없이 리필했다. 순댓국은 진즉에 없어졌고 반찬도 더 달라고 하기 미안해져서 안주 없는 술을 마시고 있으면 사장님은 맛있게 잘 익은 김치를 내주셨다. 그 우가네 사장님은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다. 영업이 끝났으면 쫓아버릴 일이지 알아서 마시라며 우리에게 열쇠를 맡기고 퇴근을 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대로 술을 꺼내 마셨고 다음 날 찾아가 술값을 드렸다. 어제 마신 술값을 내면서 또 주저앉아 술을 마셨다. 시장 끝에 있는 공용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오다 보면 상가의 불이 모두 꺼져 있는데 "우가네"라는 조그만 사각형 간판의 흐린 불빛만 덩그마니 보이곤 했다. 이 우가네에서 누구는 몰래 사랑을 했고 누구는 이별 후 깡소주를 마셨으며 머리 깎고 와서 술 마시다 입대하고 제대 후엔 군복도 벗지 않은 채 집에도 가지 않고 찾아와 술을 마셨다. 최루탄 냄새가 동네까지 번지는 날, 우리가 사랑했던 기형도도 까뮈도 황지우도 입을 다물고 술을 마시고 있노라면 사장님은 무심히 시키지도 않은 순댓국을 끓여주기도 했다. 밤이 깊어가면 하나, 둘 사라지고 마지막까지 남은 서너 명의 진짜 술꾼들은 그때야 비로소 천천히 남은 술을 마시며 소주처럼 독하고 쓰지만 끝맛은 달달한 얘기들을 나직나직 나누었다.
신촌에서 술을 마시는 날은 누군가 한 턱 내는 날이 많았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았다거나 장학금이 나왔다거나 어디서 운 좋게 상금을 받는 일이 생기면 모여서 돼지갈비를 먹었다. 안주가 안주니 만큼 소주는 그만큼 맛이 있어서 평소보다 더 많이 마셨다. 그러다가 집으로 가는 버스들도 끊기고 택시비는 당연히 없었으니 우리는 둘, 셋이 짝을 이루어 집까지 걸어갔다. 신촌에서 집까지 걸어가는데 버스로 15분이면 되는 거리를 2시간을 걸어갔다. 나는 선배 두어 명이 같은 동네에 살아서 밤길 무섭지 않게 걸을 수 있었고 그 두 시간 동안 남들이 모르는 비밀들을 알게 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누가 누구랑 연애를 한다든지, 누가 누구에게 차였다든지, 아무개에게 군입대 영장이 나왔다는 등의 얘기들이었다. 그리고 아무개가 널 좋아하고 있으니 잘해보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직접 고백을 듣기도 했다. 그 술 취한 그 밤거리에서.
우리는 대부분 학생들이었고 돈을 버는 직장인은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 선배는 당시 검찰청을 거쳐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언젠가 ㅎㅇㅇ 전 D시의 시장이 뉴스에 나오는 걸 보더니 "쟤, 초임 검사 때 내가 키웠잖아.!" 했다. 이 언니가 두주불사에 말술이다. 언니의 월급날은 안주가 푸짐했다. 한 턱 내는 마음 또한 푸짐해서 언제나 술값을 아끼지 않고 내주었다. 우리에겐 일종의 암묵적 약속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차비만 남기고 주머니에 든 건 다 내놓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중 대다수는 늘 차비 외에 돈이 없었으니 어쩌다 생긴 돈을 보태는 것이 다였고 술값은 늘 그 언니가 냈다. 그녀는 지금도 만나면 술값을 낸다. 우리의 영원한 물주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신기하게 하나씩 모이다가 7시가 넘어가면 언제 왔는지 모두 모여 술을 마셨던 그날도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방학 중이었기에 교외로 나간 것 같다. 송추 어디쯤이었는데 그만 서울로 들어오는 막차를 놓쳐버렸다. 우리는 마시다가 남은 술과 안주를 챙겨 걷기 시작했다. 밤을 새워 걸어도 집에 도착하지 못할 거리였지만 술 취한 술꾼들이 무슨 정신이 있었을까. 걷다가 다리가 아팠나 보다. 모래며 시멘트 같은 커다란 건설 자재를 쌓아 놓은 공터였는데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었고 주변은 논과 밭이었다. 우리는 그 공터에 앉아 챙겨 온 술과 안주를 꺼내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집에서 시작되어 걷는 내내 했던 토론을 다시 이어갔다. 조금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독재정권을 타도하며 민주주의와 종교, 공부와 집안 문제 등 각자의 내밀한 고민들까지 난상토론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군가 조용히 좀 해 봐,라고 했다. 그렇게 말한 선배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하며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일사불란하게 위를 올려다본 우리는 조용히 탄식을 했다. 우주의 모든 별들이 우리 머리 위에 모여 있었다. 어떤 별은 너무 커서 경이로웠다. 별을 올려다보는 사이, 우리가 벌이던 난상토론에서 표출되던 우리들의 고통과 슬픔, 상처들은 아침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그 누구도 고민 없는 사람이 없었고 그 고민 속에서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그 커다랗고 엄청나게 많은 별들을 올려다보는 순간, 고민과 아픔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없었다. 우리는 그날 조용히 별을 올려다보며 걷다가 뿌옇게 날이 밝아오면서 다시 다니기 시작한 첫 차를 타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여름 무더운 날이 되면 술집이 아닌 놀이터나 작은 공원 같은 데 모여 하늘을 올려다보며 술을 마셨다. 우리는 저마다 별을 눈에 담고 가슴에 품으며 밤새 걷다가 올려다본 그날의 그 커다란 별을 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다음 날 새벽 미사에 술냄새를 풍기며 나왔던 W선배는 지금 이 지상에 없고 술이 취하면 안주를 마시지 않던 L선배는 신부님이 되었다. 누구는 수녀님이 되었고 누구는 교수님이 누구는 사장님이 되었으며 누구는 그냥 아버지로 엄마로 그저 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 그 무덥던 여름날, 온 우주의 모든 별들이 우리 머리 위에서, 주먹만큼 큰 별들이 빛을 냈기 때문일까.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절반은 신학교에 가서 신부님이 되거나 수도회에 들어갔다. 동네 터가 성스러웠는지, 다니던 성당이 그랬는지 하나, 둘 신부가 되려고 또는 수녀가 되려고 술집을 떠나는 선, 후배들을 보며 나는 조금은 쓸쓸해졌고 인생의 흐름을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졸업을 하고 헤매다가 수녀회에 오라는 선배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결혼을 했다.
1년 전 우리 중 하나였던 선배 W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은퇴를 앞둔 신부님 L 선배는 W선배의 장례식 미사를 치르며 '내장 깊숙이' 자리한 우리의 추억들을 소환했다. 뭐가 그리 급해서 서둘러 떠났냐며 죽은 선배의 별명을 커다랗게 부르며 울먹였다. 푸릇한 풋내를 풍기던 우리는 희끗희끗한 머리의 중년이 되어 죽은 선배의 관을 들었고 울음을 삼키며 그를 보냈다. 잘 지내, 아프지 말고. 동기간의 정으로 서로를 애틋하게 다독였다. 1년 후 W선배의 기일에 다시 모인 우리는 또 술을 마셨다. 나는 이제 예전처럼 술을 마시지 않아서 캔 맥주 한, 두 잔에 취하는데 그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취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사이 20대 술꾼들로 돌아가 3차까지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예전과 다르게 저마다 술값을 내겠다고 실랑이를 했는데 술값은 L신부님이 냈다.
무더운 여름날, 간혹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무리 올려다 보고 다시 올려다봐도 그날의 그 많던 별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길게 손 뻗으면 큰 별 하나는 딸 수 있을 것처럼 가까이 있던 그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별들은 너무 멀리 있고 희미해서 날이 흐린 날도 날이 흐리지 않은 날도 잘 보이지 않아 눈만 껌벅인다. 너무 멀리 있어서 간혹 깜박임마저 없다면 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기온이 높다. 이 글을 마치면 마당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봐야겠다. 집안의 불을 모두 끄고 여름 하늘의 별을 세며 캔맥주 한 잔 해야겠다. 이제는 별이 된 선배, 사람 좋았던 그, 시몬느 베이유를 사랑했던 그에게 안부를 전하며 우리 모두 함께 바라보았던 그 반짝이던 별이 되어 하늘에서 다시 만나면 술 한 잔 하자고 인사 전해야겠다.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오는' 추억들이 여름밤 하늘에서 반짝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