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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생일을 축하하지 않는 부부.

by fragancia

* 이 매거진은 Eli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생각해 보면 생일은 정말 대단한 날이다. 한해를 무사히 버텨내고 또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다는 건, 엄청난 노력과 굉장한 행운이 모두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대 사건이다. 돌아보면 세상에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도 더는 나이를 먹을 수 없는 이들이 도처에 있다.
아무리 원하고 바라도 다시는 생일을 축하해 줄 수 없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그러니 어떻든 이렇게 살아남아 또다시 생일을 맞이한다는 건 실로 놀라운 축복이고 기적이 아닐 수 없다.

- 호호호 나를 웃게 했던 것들에 대하여. (윤가은)


Q. 당신은 어떤 생일 축하를 원하나요?




아침부터 하늘은 잿빛이었다. 낮게 깔린 구름이 세상을 무겁게 눌러 앉히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빗소리는 마치 한 박자 늦은 심장처럼 둔탁했다. 올해 내 생일은 그렇게 폭우 속에서 시작됐다. 베란다 유리를 타고 길게 미끄러져 내리는 빗물은 도로 위의 불빛을 일그러뜨렸고, 차들은 물살을 가르며 느리게 움직였다. 축하받아야 할 날이었지만, 그 비는 오히려 내 마음 깊은 곳의 우울을 더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나를 대신해 울어 주는 것처럼.


이틀째 이어지는 폭우에 긴급 재난 문자가 핸드폰을 울렸다. 작은 방에서 출근 준비를 마친 남편이 거실로 나와 TV를 켰다. 나는 여전히 베란다 앞에 서서, 커다란 빗방울들이 나뭇잎을 두드리며 부서지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부르려다 잠시 멈추더니, 내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부엌 쪽으로 발길을 옮겨 휴대전화를 들었다.


“어머님, 비가 많이 오네요. 괜찮으시죠? 오늘 아내 생일이라 전화드렸어요. 낳아주시고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고마워. 너희가 잘 지내는 게 제일 큰 선물이지. 그런데 오늘은… 좀 슬플 거야.”


“네, 압니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지나가려고요.”


스피커폰 속에서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래, 출근 잘하고…” 친정엄마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남편은 통화를 마쳤다. 그는 내게 ‘생일 축하해’라는 말을 끝내하지 않았다. 대신 평소처럼 냉장고에서 두유를 꺼내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며 “다녀올게” 한마디만 남겼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실, 우리 부부는 결혼 후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지 않는다. 연애 시절엔 꽃 한 송이를 건네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때도 있었지만, 결혼 후에는 1년에 한 번, 결혼기념일만 챙기기로 했다. 아쉬운 마음에 결혼 첫 해, 나는 남편 생일에 시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한여름에 아들을 낳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을까요. 멋지게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시어머니의 웃음소리가 잔물결처럼 번졌다.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면서 내 생일에도 그래주길 남편에게는 강요하지 않았다.




4년 전, 내 생일이던 날, 사랑하는 막내 이모가 말기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7월의 한가운데, 그날도 장맛비가 내렸고 코로나 시기라 보호자 한 명만 이모 곁을 지킬 수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밖에서 손을 꼭 잡은 채 조금만 더 버텨 달라고 간절한 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모는 더 이상 아픔과 고통이 없는 상태로 떠나버렸다. 그 후 내 생일은 축하의 날이 아니라, 한 생의 끝과 다른 생의 무게가 겹쳐진 날이 되었다. 남편을 포함해 친정 식구들은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생일 축하해’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대신 남편은 내가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린 것처럼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해 감사를 표현했다.


올해 내 생일, 폭우는 하루 종일 멈추지 않았다. 빗속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각자의 우산 속에서 자기만의 하늘을 지키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요란하게 불꽃을 쏘아 올리고,
어떤 사람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며 생일을 기념하고,
어떤 사람은 그저 조용히, 누군가의 빈자리를 가만히 껴안는다.
우리는 이제 세 번째 사람에 가까워졌다.


생각해 보면, 생일은 참 놀라운 날이다. 한 해를 무사히 버텨내고 또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는다는 건, 엄청난 노력과 굉장한 행운이 함께해야 가능한 일대 사건이다. 세상에는 아무리 원해도, 더는 나이를 먹을 수 없는 이들이 많다. 내 이모도 그중 한 명이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남아 또 한 번 생일을 맞이한다는 건, 실로 축복이자 기적이다. (호호호 나를 웃게 했던 것들에 대하여)


생일 날 내리는 비가 가족들의 슬픔을 씻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모의 부재, 남편의 침묵, 나를 낳아준 엄마의 목소리, 아무 말 없이 곁에서 날 지켜주는 가족들의 온기. 그 모든 것이 폭우 속에 뒤섞여 나만의 생일 풍경을 만들었다.


앞으로도 우리 부부는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각자의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그를(그녀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 마음이야말로 꽃보다, 케이크보다 오래 남는 선물이니까. 그렇게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지 않는 부부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말보다 깊고 오래가는 사랑이 숨어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1535724.jpg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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