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얘기, 나만 못 알아듣는 건가요

by 류리원

외부 손님이나 처음 보는 사람들과 미팅할 때,

다른 부서나 우리 부서에서 새로운 이슈로 회의할 때,

'나만 못 알아 들었나'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저 내용을 한번 듣고 이해한 건가?

다 이해해서 저 질문을 하는 건가?

저렇게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어떻게 요점을 이렇게 잘 짚나?


나도 나름 괜찮은 프로필과 한때 우수했던 지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게다가 지금 나의 일을 함에 있어 업무지식이 충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내가 알던 나'와 '오늘 다시 본 나'가 충돌하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해력이 왜 이렇게 모자란가.


[왜 못 알아듣지?]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내가 '머리가 나빠서',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다.

나는 꽤 오랫동안 그 생각이 들어서 괴로웠던 것 같다.


미팅 때 딱 요점 파악을 하고, 여기서 부족한 게 뭔지 인지하고서 예리한 질문을 날리고, 상대를 감탄시키고

이러지 못한 것들이 내 머리가 내가 알던 것보다 나빠서라고..

내가 내 기대치만큼 회사에서 해내지 못했을 때 늘 그렇게 결론지었다.

모든 실패를 나의 뇌기능 쇠퇴와 민첩성 부족으로 돌리면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했다.


근데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그랬으면 어제 내가 해낸 일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이건 경험의 부족이다.


회사에서 내가 잘 이해 못한 내용이 있다면 경험의 부족인 사유가 60~70%,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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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차이]

내가 대리쯤이었을 때, 다른 본부의 차장님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일을 꽤 잘하는 차장님이라고 들었는데

나에게 던지는 질문 수준은 처참했다. 질문의 수준을 따지면 안 되지만 이곳은 회사가 아니던가. 심지어 10년을 넘게 다니신 분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나 싶었다. 같은 회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 기본적인 것들이었다. 검색사이트에만 찾아도 나오는 것들일 수도 있는데...


그래서 느끼게 되었다. 경험!

이 사람은 우리 본부에서의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니 우리 쪽 정보에 대해서는 신입사원보다도 모르는 것.


그러니 내가 처음 들어간 미팅에서 잘 못 알아들었다면,

그건 내가 그쪽으로 경험이 부족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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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속의 차이]

경험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함에도

여전히 자신이 무능한 탓이라는 생각을 한 줄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 수 있다.


똑같이 처음 만났는데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은 잘 알아듣고 질문을 잘하더라고.


그런데 그 사람들

대부분 나보다 오래 다녔거나 내가 있던 부서에서 나보다 더 오래 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첫 번째로, 팀장님과 부장님과 그 이상의 임원은 나보다 회의나 미팅에서 나온 얘기를 더 빨리 알아들을 수밖에 없다.

나보다 회사일을 많이 한 것에 더불어 남의 부서 혹은 밖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주워들은'얘기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들의 친구도 회사의 팀장님, 부장님들인데

그들이 1시간만 모여있어도 내가 내 회사동기랑 모여있는 것보다 엄청 난 정보가 오고 갈 것이다.

축적되어 버린 '주워들은, 흘려들은' 얘기는 무시 못한다.


아주 적당한 예로, 아이돌에 대한 정보는 누가 많은가?

아이돌을 좋아하는 중1딸과 서울대학교 출신에 지금도 여전히 공부를 좋아하는 엄마 중 누구일까.

당연히 중1딸이 더 많이 안다. 똑똑한 엄마가 지금에서야 아이돌에 대해 스터디한다 한들

축적된 아이돌 리더에 대한 정보를 엄마가 따라잡기 매우 힘들다.


중1딸은 이미 등교하는 순간부터 정보의 바다에서 하루를 보낼 것이다. 아이돌 리더뿐 아니라 사전녹화할 때 '오빠'들을 볼 방법이 뭐가 있는지, 더 나아가 오빠들이 출연하는 예능 작가는 어떤 스타일 아이돌을 주로 캐스팅하는지, 오빠들의 소속사 사장님은 어느 소속사 사장님하고 친한지도 알 정도로 방송계에 빠삭해진다. 그럼 어디서 방송에 관련된 얘기가 나온다면? 엄마보다 더 빨리 알아들을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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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팀장님이 아닌데 옆에서 예리한 질문을 쏟아내던 다른 직원은?

부서에서 더 오래 일을 해와서 익숙한 경우나 어디서나 들은 적이 있는 얘기이니 더 잘 이해했을 것이다.


위의 중1과 같이 살고 있는 고2 친오빠가 원치 않게 아이돌 리더의 생일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고2 오빠는 모르긴 몰라도 자기 친구들보다는 남자 아이돌에 대해 더 많이 알 수밖에 없다.




[경험이 작업복이 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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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은 무시 못한다. 수능 언어영역에서 마찰력을 설명하는 비문학 지문이 나오면 몇만 수능생이 처음 보는 지문이라도 이과생은 어딘가 모르게 편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하는 그런 것과 같다.


내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도

내 업무처리를 보고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 후배나 업무 인수자, 기타 등등 누군가들이 있다.


직장에서 우리가 서로 부러워하고 있는 상대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엔 타고난 지식 같겠지만 축적된 경험의 아우라이다.

그곳에서는 경험이 작업복이 된다는 걸 잊지 않고

내 머리 탓은 그만하면 좋겠다.


머리가 나쁜 건 '사실'이 아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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