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자리의 말과 양

얼마만큼 말을 하고 살아야 할까요

by 류리원

다른 부서와의 회의가 있었다.

혼자 가려고 했는데, 팀장님은 상대부서에도 팀장이 나오는 곳이니 내가 혼자 가는 것보다 둘이 가는 게 낫겠다며 함께 동행해 주었다.


그런데 상대 팀장이 본인 부서에 득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며 성을 내기 시작했다.

현대사회에서는 보기 어려운 소위 '똥'매너를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사실 그 팀의 협조가 관건인 상황이라, 신사적인 우리 팀장은 침착하게 대응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신사적인 팀장이 거의 혼자 당하는 수준이었다.


회의실에서는 상대의 고성만 연신 들려오며 나의 심리상태를 흔들어놨다.

이 흥분의 도가니 속에 언제 껴들어서 갈등을 종식시켜야 하나 고민과 번뇌를 거듭하다

결국 나는 내가 껴들어야 할 타이밍을 놓쳤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따로 없었다.


"내가 이 말했다가 팀장님이 괜히 더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어쩌지?"

"내가 이 얘기했다가 앞에 있는 이 꼰대가 더 열받아서 그나마 움직인 마음을 다시 되돌리면 어쩌지?"


말꼬리를 물고 계속 시비를 거는 상대 팀장에게

자칫 내가 보탠 말 한마디가 원치 않는 결과를 가져올까 봐

오만 생각이 오가다 자리는 결국 끝이 났다.


[회의에서 힘이 되지 못한 나]

회의장을 나오면서 내가 든 감정은...

미안함: 기꺼이 동행해 준 팀장님에게 오히려 혼자 짐을 지게 하여 면목이 없음

불안함: 팀장님이 나를 원망하게 될 것 같다는 짐작

자책감: 꼼꼼히 챙겨 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방어도 못한 내 능력을 원망


팀장님에게 미안하다는 얘기도 하지 못했다. 더 구차해 보일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 저 팀장 제발 똑같은 인간 만나서 거울치료나 받아라.' 이런 저주 말고는 없다는 사실에 내가 더 초라해졌다.


도대체 나는 어쩌다 필요한 순간에 말하는 능력을 잃은 걸까?


어떤 회의에서든 자신, 자신의 부서를 위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의견을 내던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럼 이렇게 미안할 일도, 불안할 일도, 자책할 일도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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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필요한 말]

나의 이 복잡한 심경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다.

"팀장님은 그러라고 그 자리 있는 거야. 그래서 월급도 너보다 더 받잖아."


솔직히 큰 위로는 안 됐지만 사실 맞는 말이긴 하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윗사람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참으로 기특하긴 하지만 필요가 없다.

내가 거기서 팀장님을 지키고 혼자 말했더라면 그것도 웃긴 상황이다.


예를 들어, 내가 후배 사원과 둘이 회의를 갔는데 그가 말은 안 하고 가만있었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 욕을 했을까?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주어진 자리에서 해야 하는 말의 양이 있다.

대리님은 사원보다 많이 말할 줄 알아야 하고, 과장님은 대리님보다 더 많이 말할 줄 알아야 하고.

그저 직급과 경력이 쌓이면서 나는 그에 맞게 나의 말을 점점 늘려가면 된다.

어떻게 매번 어느 자리에서건 당당하고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있으랴.


팀장님도 낳을 때부터 청산유수였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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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무언가를 지켜낼 방법이 꼭 말뿐인 건 아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말을 하지 않은 동안 동안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물론 부서를 위해 목소리를 낸 사람도 역할을 했겠지만

무엇이 더 좋은 방향일지 계속 고민하고 있던 나도 그 순간 부서를 위해 애쓴 것이 맞다.

일이 잘못되지 않게 하려고 그 업무에 주인의식을 갖고 고민하는 역할을 했다.


그 순간은 조용했을지라도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회의가 끝난 이후 열심히 수습책을 강구하고 있는 나를 격려정도는 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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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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