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비숍인데 자꾸 퀸을 하래요

도망가고 싶을 때

by 류리원

인도나 이란 그 어디에선가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체스.

그리스 장군이 전술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유래도 있는데, 그래서일까.

특정위치에서의 인간의 특성과 그들 간의 관계를 정말 잘 담아놓은 듯하다.

현대의 전장(戰場)인 직장은 체스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체스는,

한 발짝씩만 움직이는 몸집 무거운 킹을 사수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며

전방위적 공격이 가능한 최종병기 퀸은 최종 한방을 위해 기다리고

다른 기물들은 상대로부터 퀸으로의 경로가 뚫리지 않게 열일하며 희생한다.

체스.png

킹: 1개/ 직진, 대각선, 후진포함 한 칸씩만 움직임. 보호대상이긴 하나 몸이 무거워 세상 기동력 없는 기물

퀸: 1개/ 킹처럼 모든 방향 이동이 가능한데 이동 칸 수에 제약이 없음. 상대는 이걸 잡기 위해 혈안

룩: 2개/ 직진만 가능하며 칸 수에 제약이 없음. 불도저

비숍: 2개/ 대각선만 가능하며 칸 수에 제약이 없음. 대각선 불도저. 룩보다 좀더 빈틈을 노린다.

나이트: 2개/ 한 칸 직선이동 →한 칸 대각선 이동. 이동칸에 제약은 있지만 분명 복병이 된다.

폰: 8개/ 앞에서 몸빵 하는 애들. 그러나 얕볼 수 없다. 전진하다가 대각선에 있는 상대 기물을 잡을 수 있다.


비숍은 대각선으로만 움직이는 기물이다. 용도가 아주 명확하다.

보통 대각선 질주 후 곧 퀸, 룩, 폰, 나이트에게 희생되는데

만능병기 퀸과 다르게 팀 내에서도 보호 대상은 아니다.


[체스를 하다 보면 나의 직장생활이 투영된다]

어지간해서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이제는 누가 써주는 멘트여야 발언이 가능한 킹(임원)을 위해

퀸(부장, 팀장과 같은 관리자급)으로 거듭나고 싶어 하는 여럿의 직장인.


난 회사에 다니며

10년이 넘어서부터는 비숍이 된 기분이었다. 그만큼의 용도와 역할을 해야 하는.

그리고 그 역할을 받아들이는 중견사원.


그런데 자꾸 나에게 퀸의 역할을 강요할 때가 있다. 종횡무진 활약하라고.

비숍만큼 월급 주면서 퀸 하라고 하면 화난다.



[퀸을 시켜줄 건가요? 아님 뽑아먹기만 하실 건가요]

벅찬 일을 맡을 때가 있다. 엄살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벅찬 일.

그럼 자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우리는 위로를 시작한다.

'이런 일은 내 짬에서 할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시키는 걸 보면, 내가 잘한다는 뜻인가?'


그러나 이런 벅찬 일에 지쳐가다 보면 생각이 바뀌기 마련.

'해오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오니까 그냥 던지는구나... 대안이 될 누군가가 없으니 차악을 찾는 것처럼'


둘 중 뭐가 맞을까.

보통은 전자가 맞다고 한다.

여긴 학교 아니고 회사이고, 일은 무조건 잘되고 봐야 한다는 사람들만 모인 곳이니까.


차가운 현실을 말하자면 간혹 후자인 쪽도 있다.

내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아도 밀어 넣는 경우가 있다.

퀸(팀장, 부장 등)들은 킹 앞에서 자신이 잘하고 있었다는 것을 뽐내기 위해

다른 기물(비숍, 나이트, 룩, 폰)을 열심히 볶는 것.


사장님 입장에서야 누가 하든 결과만 좋으면 즉, 자기를 체스판에서 살려만 내면 되는 것인데,

나의 부장님, 팀장님 입장에서는 사장님에게 어떻게든 내 부서에서 사장님이 원하는 일을 해냈다고 어필하고 싶을 것.


그러니 그중 가장 '가능성'이 있는 기물을 찾아 성공해 올 때까지 푸시한다.

주로 푸시의 대상은 비숍이 된다. 가장 실무를 많이 하고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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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비숍 월급 받고 퀸 하라니까 화나는 금전적 이유를 떠나,

내가 당할 망신이나 받을 비난이 무서워서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순간이 온다.


피할 수 없다.

피한다고 그만둔다고 해 봐야 내일 그만두지 않는 이상 그 일은 하고 그만둬야 하니까...

롤러코스터 타고 올라가는 기분이다.


더욱이,

"네가 잘하니까 그런 거야" 이런 얘기는 위로되지 않는다.


벅찬 일을 맡은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그들이 요구한 만큼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위축감과

당일에 할 실수를 예상하며 불안해진다.


그 괴로움은 누구도 덜어내줄 수 없다는 건 잘 안다.


그런데, 내 경험상 꼭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


막상 그 일을 해야 하는 그날이 오면(예를 들면 발표 같은) 알게 될 것이다.

내가 100을 준비했는데 사실 이건 70짜리 일이었다는 거.


사람들이 내 실수에 크게 반응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기들도 해봤으니까 이것이 긴장할만한 일이라는 걸 알거나,

내용을 전부 다 이해는 못해서 내가 실수했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어차피 뭘 하든 그날은 내가 제일 잘 아는 사람이다.

기세가 꺾여있다는 걸 들키지 않고 잘 아는척해야 한다.


'아우라'는 먹힌다. 내가 그날 준비할 건 '아우라'다.

발표를 하든, 질문에 대답을 하든 아우라가 무기다.


그리고 혹시 내가 실수를 하면.

혼나는 건 퀸이다! 퀸도 그 정도 risk taking은 했다는 거.


체스판은 그런 곳이다.

기물 그 어느 누구도 혼자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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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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