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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한 May 02. 2018

새벽의 기나긴 산책

카카오맵을 믿고 늦장부리다 인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막차를 놓쳤다. 지하철도 끊긴 시간이었다. 바로 택시를 타고 오기엔 치킨 두 마리를 시켜 먹을 수 있는 돈이 아까웠지만 별 수 있는가. 다시 카카오맵을 틀어 대중교통이 아닌 도보로 가는 길을 확인해본다. 20.8km에 예상 보행 시간 5시간 23분이 나온다. 이런 무모한 수치가 나오면 대부분 '에라이' 하고 택시를 타겠지만, 나는 '으흠' 하고 망설였다. 기본적으로 걷는 걸 좋아하고, 그것도 인적이 드문 새벽 시간대에 처음 걷는 길이라면 평소와 다른 의식의 결을 느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아무 의미없어 보이는 걸음을 주구장창 뚜벅뚜벅 잘도 걷는다. 여행을 가서도 그 도시의 숨결을 느껴보기 위해 시간을 염두하지 않고 일단 어디까지든 걸어보는 편인 것이다.


결국 인천 계양구에서 부천을 지나 서울 신월동으로 접어들어 한강 다리를 건너고 홍대까지 걸어보기로 결정했다. 밤 12시가 지나 출발했으니 카카오맵대로 라면 새벽 여섯 시, 해 뜰 무렵에 도착하겠지만 이미 한 번 속았는데 곧 바로 다시 속을까. 목표 도착 시간을 새벽 네 시로 잡고는 걷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뒹굴리면서 억지로 잠을 피하는 그 시간대에 오늘은 꾸역꾸역 걸어보는 것이다. 자동차 엔진 동력으로 좁아진 지역과 절약된 시간을 길게 펼쳐내는 움직임을 한 걸음씩 찬찬히 옮겨보는 거다. 무심하게 지나치는 버스밖 풍경에 돋보기를 대고, 바람처럼 스쳐가는 세상의 흐름을 슬로우 모션으로 바라보도록 하자. 아니다, 슬로우 모션이 아니라 잠시 빨리감기를 멈춰본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일요일 새벽 길바닥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자동차는 옆에서 쉴 틈 없이 지나다니지만, 그 안에 인격체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별로 체감하지 않는다. 휴대폰 잔여 배터리는 고작 30프로 정도. 벌써 몇 년째 사용한 아이폰이 이 새벽 시간대 얼마나 빨리 잠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이폰이 꺼진다면 길찾기가 퍽이나 곤란할 테니 집에 끝까지 걸어가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귀에서 이어폰을 떼냈고, 여자친구의 걱정을 무릅쓰고 카카오톡에서 짧은 작별을 고했다. 무수한 정보가 쏟아져나와 심심할 틈 없는 데이터 세계도 잠시 안녕이다.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된 기분이다. 새벽이 된 도시의 거리를 걷고, 혼자가 된 숨결과 걸음, 그리고 마음 소리를 여한없이 들어볼 뿐이다.


길을 걷다가 문득 뒤를 훽 돌아보았다. 그것도 거의 180도를 틀어서. 옆으로 차만 지나다니는 풍경 위에 엄한 범죄 스릴러 영화 한 대목이 엎질러진 탓이다. 이 야심한 새벽에 혼자 걷다가 혹시 모를 장기 매매범 집단이 나를 쫓아온다면 그야말로 인생이 위태로울 것이다. 꼭 집단이 아니라도 어떤 정신 나간 이가 뒤를 돌아본 나를 향해 갑자기 뛰어오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나.(완전히 뒤로 돌아 올 때까지 그대로 노려본다는 시뮬레이션을 그려보았다, 시뮬레이션일 뿐이니깐)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고, 다시 돌아온 앞에도 아무도 없었다. 그저 혼자서 걷고 있다. 어느 정도 걷다가 한 번을 더 돌아보곤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앞만 보고 걷기에도 갈 길이 멀다.


계양구에서 부천으로 들어가는 어느 길목에서는 어느새 건물이 완전히 사라졌고, 대신 포크레인이 커다란 정적 속에서 멈춰있다. 드넓은 논밭이 나왔고 비닐하우스인지 컨테이너 박스인지 하는 게 어설프게 모여있다. 새벽 시간대 혼자 그 넓은 논밭, 숨죽인 어둠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밝은 날 기차탈 때나 흘려볼까 말까 한 볼품없는 공간이 작은 두려움을 찔러댄다. 순간 인기척을 느낀 개가 나를 향해 크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평소에 좀처럼 없는 상황인지 열과 성을 다해 무척 흥분한 느낌이었다. 만약 그 개가 따로 묶여있지 않은 들개라면, 그런 상상이 들자 소름이 끼쳐왔다. 한 개가 짖더니 근처에 있는 다른 개들도, 짐작컨대 여섯 마리 정도의 개가 우렁차게 짖어댔다. 그들을 뒤로 몇 백 미터(?)가 지나서야 간신히 울음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러자 어떤 개울가에 다다랐는데, 이번에는 수백 수천 마리의 개구리 울음 소리가 공백없이 들려왔다. 봄에 깨어난 개구리는 도대체 언제 자는 걸까? 봄에 깨어났으면 밤에 잠들어야 정상 같은데 그들은 겨울이 아니면 잠들 줄 모르는 것 같다. 개울가의 개구리들과 그들이 낳은 개구리 알의 촉감이 떠오르더니 얼른 그 자리를 뜨고 싶어졌다.


이쯤에서 카카오맵을 다시 봤는데 동물들의 울음소리에 홀렸는지 잘못된 길로 들어서 있었다. 다시 뒤를 돌아 제대로 된 길을 찾아갔고, 다행히 다시 건물과 차들이 나타났다. 도로의 표지판을 보고 부천으로 접어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많은 택시가 나를 보면 슬금 다가오면서 속도를 늦춰줬는데, 그걸 애써 외면하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걸음이라는 흐름을 거부하기 힘들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걷다 보면 인격이 없는 다리가 나를 운송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카카오맵을 보니 어느새 1/3 정도를 걸어왔다. '벌써 이만큼 걸어왔는데 나머지쯤이야' 하는 오기가 생겼다. 어느 초등학교를 지나고, 빌라 단지를 지나고, 공원을 지나고, 불이 밝혀진 편의점을 반갑게 맞이하니 서울 신월동으로 접어들었다.


건물이 많고 곳곳에 편의점이 있는 서울에서는 그나마 안심이 되어서 긴장이 풀렸고, 가게 간판을 구경하며 재밌게 걸었다. 피아노, 태권도, 도매 업체, 세탁소, 평소에는 아무런 흥미없던 가게들이 낮에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운영될지 무척 궁금했다.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어떤 고깃집은 마감이 되었는데, 사장이 혼자서 소주와 맥주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들어가서 같이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무슨 사연이 있는지 들어보고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눠보고 싶었는데, 그거는 그 사람과 상관없는 나 혼자만의 마음일 뿐이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가게를 한 번 더 뒤돌아봤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어두운 빌라 골목에서 나말고 홀로 걷는 사람을 만났다. 어쩌다보니 얼마 거리를 두지 않고 걸어가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내 걸음 소리와 주머니 속 열쇠 소리가 그 사람에게 긴장을 유발하는 듯이 느껴져서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까 내가 의식한 그 상상속 위협의 인물이 어쩐지 지금은 내가 돼버린 것 같아 어둠이 차갑게 느껴졌다.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는 특이한 이름의 모텔들과 아무런 브랜드도 없이 양주/맥주 라고만 적힌 무성의 한 술집들이 줄지은 거리. 저 앞에서 웬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는데, 다가가니 여자 세 명이 비뚤어진 삼각형의 구도로 서있다. 술 취해서 괜히 싸우고 떠들고 그러나보다. 느슨한 삼각형 변을 뚫고 가려는데 심심하니 놀아주라고 부른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지나간다. 몇 번 더 부르는데, 의식도 하지 않자 술에 특히 취해보이는 한 사람은 인식되지 않는 자기가 황당한지 코웃음을 친다. 그들은 왜 거기에 서있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았지만 당연히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걷기 시작한 처음과 동네 근처로 다가온 마지막 즈음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이 먼저고 어느 곳이 나중인지, 어느 곳이 앞이고 어느 곳이 뒤인지 잘 분간이 안 된다. 다만 축소된 세계에서 사는 게 일상인 내가 효율성을 잔뜩 떨어뜨려 길게 늘여놓은 이 시공에서 지루함 없이, 오히려 큰 흥미와 스릴을 느끼며 생생하게 걸어왔다는 체감이 남아있다. 지금 내가 느리게 천천히 느끼는 공간과 시간이 오랜 진실이고 향수라는 사실을 유전자의 차원에서, 선조의 입장에서 슬그머니 납득해본다. 


다시 카카오맵. 이제 곧 선유도 공원을 가로질러 한강을 건너면 드디어 합정에 다다르고 곧 집에 도착할 수 있다. 걸을 만큼 걸어서 잠깐 버스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발바닥, 발, 발목, 종아리, 무릎, 허벅지 근육, 허벅지 안쪽 살까지 크고 작은 압박감과 쓰라림이 온 하반신을 덮치고 있다.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땐 처음 같지 않은 걸음걸이가 되었다. 무심하게 걷기에는 부담스러운 상태. 한 걸음 걸음에 주의를 기울여 신중하게 이동한다. 조금만 더 걸으면 내가 좋아하는 한강도 나오고, 푹신한 침대가 나를 기다린다. 사람 없이 텅비어 있는 한강 공원에는 편의점만 하나 덩그러니 밝혀져있었다. 식수대가 보여 시원하게 목을 축이고, 몇 번을 두리번 거린 후 근처에 있는 나무에다 거름을 주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주위를 두리번 거렸는데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계단을 올라 한강 다리 위로 올라가서 걷기 시작한다. 삐걱 거리는 나무 바닥이 폭삭 가라앉을까봐 심히 조마조마 해야했다. 이 높이에서 왜 이런 부실감을 느껴야하는지 알 수 없다. 다리에서는 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치고 있었는데 걷고 있는 나도 졸린 만큼 그들이 졸음 운전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혹시라도 운전대를 놓쳐 내 쪽으로 달려든다면, 나는 4월의 마지막 날 처음 보는 자동차와 어두운 한강에 빠져야만 할 테니까. 다리를 걷다가 뒤에서 빛과 소리가 느껴져서 옆으로 돌아보니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었다. 분홍 모자와 검정 가죽 자켓, 검은색 추리닝 바지를 입은 그녀는 나를 앞질러갔다. 걷다보니 그녀가 세워둔 자전거가 보였고, 그녀는 다리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길거리 흡연에 질색하지만 그녀의 흡연에는 어쩐지 정당성이 느껴져서 아무렇지 않았고, 오히려 그 맛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난간에 기댄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는지 그녀를 지나치면서, 만약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한강에 하얀 거품이 일어난다면 바로 신고를 해야겠지, 하고 생각했다. 한강을 건너 다리를 내려오고 얼마 안 있어 그녀는 나를 또 앞질러갔다. 하긴 그런 장소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을 정도의 사람이 그런 선택을 할 리는 없는 것이다. 그곳에 떨어지고 싶었던 건 내 마음의 깊숙한 곳, 작은 일부였을지도.


얼마 전 여자친구와 함께 데이트했던 익숙한 거리, 합정에 드디어 왔다. 그 날의 데이트가 떠오르자 문득 여자친구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여자친구를 만나면 이 다리에 느껴지는 지긋지긋한 무게감과 피로함이 금세 사라질 것 같았다. 내 바운더리 안에 들어왔다는 안도감과 여자친구 생각에 방심했는지 길을 잘 못 들었다. 다시 돌아와 걷기 시작하니 이번에는 미칠듯한 공복감이 느껴졌다. 집 근처 24시간 국밥집에서 돼지국밥과 냉면을 모두 시켜 먹고, 집으로 가면서 햄버거를 포장해 맥주와 함께 마실 생각을 했다. 한 입 한 입을 누구보다도 정성스럽고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었다. 홍대 근처에 오자 거리에 드러누워 잠들어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잠 속의 하품 소리가 꼭 편안한 집에 안락히 누워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사는 동네가 이만큼이나 재미난 곳이다. 


새벽 4시, 기어코 집에 도착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의외로 공복감이 사라졌다. 땀에 젖은 옷을 벗어던지고 바로 샤워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고 푹신한 침대 위로 누웠다. 침대 위에 누워 다리를 큰 베개 위에 올려두자 다른 모든 잡상과 욕구가 사라졌고 이 세상이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하게 느껴졌다. 카톡으로 집에 도착했다고 여자친구한테 보고하자 진동에 잠을 깼는지 금방 답장이 돌아왔다. 깨워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시금 그녀를, 온라인을, 불켜진 세상을 접하게 되자 그게 새삼스럽게 반가워서, 그렇게도 지친 몸이 쉽사리 잠에 빠지지 못했다. 영원처럼 느껴질 잠을 목전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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