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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한 Nov 14. 2018

아픔

2014년 장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으니 벌써 상경한지 4년이 지났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던 간절하지만 풍족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지난 4년을 돌이켜보면 나는 서울에 와서 한 번도 병원에 갈 정도로 아프지 않았다. 아플 여유가 없었으니 아프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까.
 
그런데 이번 환절기에 다가 온 몸살 따위의 아픔은 조금 달랐다. 세상과 나 사이의 경계선, 존재의 껍데기를 끊임없이 인식하게 만들었고 그 존재의 구속감이 답답하다고 느껴졌을 정도니. 아픔은 자연스럽게 존재와 죽음, 영혼 같은 근본적인 걸 상기시켜주는 것 같다. 죽을 정도로 아팠다는 엄살을 부릴려는 건 아니지만, 죽음을 떠올려볼 정도로 육체가 신경쓰였다.

멀쩡하다가 무슨무슨 불치병으로 갑자기 떠나는 이들을 몇몇 바라보면서 그것이 나와 아주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 충분히 나한테도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더욱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병원 진료 결과 다행히 단순 몸살,장염 정도 였다. 혈압,맥박은 자꾸 높게 나왔는데 의사는 내게 불안하냐고, 긴장했느냐고 믈어보았다. 별로 그럴 상황이 아닌지라 아니라고 말하긴 했지만 어쩐지 스스로에게 다시 되묻게 되었다. 난 어느순간부터 이곳에서 어떤 전제 같은 걸로 존재의 긴장과 불안을 느꼈던 것일까? 명백한 긍정/부정으로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타지에서 아프면 서럽다'는 말이 있는데 여자친구가 옆에서 챙겨주고 도와주고 대화하고 무엇보다 함께 있어주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심과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나는 한없이 어둡고 우울한 시간 속에서 어디론가 더 깊어졌을 것이다. 존재의 긴장과 불안을 곧바로 수긍하지 못한 이유는 여자친구의 존재 이유가 가장 크다. 그녀는 나에게 세계에 대해 재정의 시켜준 게 너무나 많은 고마운 사람이기에.

아프지 못하던 시기를 지나 아픔을 겪을 만한 시기로 건너왔다는 걸 반가워해야하나. 아플 준비가 어느정도 되었던 걸까. 약국에서 받은 알약을 집어삼키고 그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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