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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한 Oct 11. 2017

전기장판

겨울은 어김없이 갑작스레 찾아와서는 온 세상을 덮었다. 집으로 찬공기가 쉽게 새어든다. 작년보다 더 춥다고 느낀다. 벽이 얇아진 것도 아니고 창문에 구멍이 생긴 것도 아닐텐데. 작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작년에는 보일러를 틀었지만 올해는 전기장판을 새로 구매했다는 점이다. 


별명은, 그러니깐 상징성은 함부로 부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다. 나는 이 세상에 '사슴'이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지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동물이 그렇게나 많은 이 세상에서 왜 유독 사슴은 세상 곳곳에 깊숙히 침투해서는 나에게 존재감을 알리는 걸까? 프레이밍.이라고 단어를 떠올린다. 그렇다. 사슴 말고도 다른 동물 많을 테다. 하지만 사슴은 다른 동물들을 제쳐두고, 다른 동물들의 색채를 흐려놓고 상징성을 말소하고 심지어 생명력을 축소시켜놓고는 내 안으로 달려 들어온다. 그리고는 내 안에 설치된 복잡한 덫에서 도저히 빠져나갈 생각이 없다. 복잡한 덫에는 안락한 쇼파가 깔려있고, 먹이가 풍족하게 쌓여있다.


일본 간사이 지방의 지역 나라에는 사슴 공원이 있고, 나는 당연히 들려야하는 관광지인 마냥 그곳에 갔다. 서울숲에도 사슴을 방목하는 곳이 있다. 어린이대공원 어느 햇빛이 비치는 곳에도 사슴이 졸고 있었다. 뚝섬 유원지에도 어떤 다리 위에 사슴이 매력적으로 그려져있다. 새로 구매한 매트에조차 사슴이 박혀있다. 그저 가격대비 평이 가장 좋은 걸 샀을 뿐이다. 그것도 바둑판 배열로 수십마리나 서있다. 


상징성은 그대로 남아있고, 아니 오히려 더 내 마음속에서 활개치게 되었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다. 실체는 사라졌지만 상징성은 남아있고, 실체보다 더한 생명력으로 존재를 과시한다. 별명은 함부로 지어주는 게 아니다.


보일러를 틀면 집안 전체에 열이 나서, 온도 설정을 한대로 24도까지 쉬이 올라간다. 전기매트는 아무리 강하게 틀어도 온도가 15도 언저리에 머문다. 9도차. 작년 겨울의 그녀에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있었지만 올해 겨울에는 완전히 그 상징성만 남았다. 사라져가는 실체는 활개치는 상징성보다 9도 더 따듯한 모양이다.


갑작스러운 추위는 없던 외로움까지 끌어다온다. 그것도 9도차의 추위는 질이 나쁜 외로움을 가져온다. 꼭 해결해야만 하는. 외로움을 해소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을까. 하나는 미래의 촛불을 떠올리며 한걸음 힘차게 나아가는 것, 다른 하나는 과거의 향수를 되새기며 뒤돌아 웅크려 앉는 것. 촛불을 들 힘도, 지켜나갈 희망도 없다. 유독 활기발랄한 사슴이 뛰어나와 위태로운 촛불 주위를 정신없이 맴돈다. 흔들리는 촛불을 보며 사슴은 호기심이 생겨 달려들고, 모래바람이 들이닥쳐 촛불은 맥없이 꺼져버린다. 피가 생생히 도는 사슴을 뒤로 두고, 웅크려 앉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향수 대신에 찬공기가 들어와 코가 얼얼해진다.


이소라 음악을 듣는다. 이소라 음악을 들으면 끝없는 외로움에 수장되는 느낌이 든다. 나의 외로움은 그곳에서 이상한 위로를 얻는다. 겨울에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 한번씩 든다. 무의미한 상상 하나. 여기에 버튼이 있습니다. 이것을 누르면 당신은 아무런 고통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당신에 관한 모든 정보도 함께 소거됩니다. 즉, 당신 주변 사람은 당신의 존재를 잊게, 아니 아예 없던 것이 되고 그래서 슬퍼할 일도 그리워할 일도 없게 됩니다. 당신은 이 버튼을 누르겠습니까? 쉽사리 그 버튼을 팽개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대신에 전기장판의 ON버튼이나 누른다. 피가 생생히 도는 사슴은 그나마 나를 따뜻하게 해준다. 몹쓸 상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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