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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한 Oct 11. 2017

추상적인 눈물

거친 숨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닫힌 창문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번져있었다. 폰을 눌러 시간을 확인해보니 6시다. 나는 지금이 새벽 6시인지, 오후 6시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죽음 같은 잠을 잔 후 삶의 한복판에서 막연히 깨어났고, 뭘하다 잠들었는지 앞으로는 뭘 해야할지 짧은 순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당혹스러웠다. 몇초 후 내가 낮 4시쯤 잠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여전히 지금이 새벽인지 오후인지는 어렴풋했다. 잠시 뒤 떠오른 생각은 저녁 8시에 있는 친구 음악회에 가야하는데(했는데) 였고, 휴대폰으로 날짜를 확인하고 나서야 다행히 오후 6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루할 뿐이었던 음악회를 즐긴 기억이 하나도 없었는데, 10월초에 색소폰 부는 친구 초대로 예술의 전당에서 합주를 듣고는 음악회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뒤바꼈다. 나는 그날 음악을 듣다가 문득 눈물을 두방울 흘린 것이다. 내게 눈물은 무척 희귀한 신체 반응이다. 내 삶에 아주 가깝게 맞닿아있는 분노나 슬픔을 유발하지 않는 이상 난 그것을 잘 흘리지 않는다. 대놓고 슬프라고 만든 영화를 봐도 울컥하거나 간신히 눈시울 뜨거워질 뿐이다. 근데 그 합주를 듣고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눈에서 물이 주륵 흘러나왔다. 난 그 반응을 기억하고 다시금 관찰하고픈 맘에 짧은 간격을 두고 다시 친구가 초대해준 음악회에 기꺼이 찾아간 것이다.


눈물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인체에서 가장 추상적인 물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눈이 고통스러워 나오는 물을 제외한) 모든 눈물의 재료는 감정이다. 그것이 슬픔, 분노, 기쁨 등으로 한없이 치솟는 절정에서 울컥하고 뭔가 차오르는 느낌이 생기고 거기서 어떤 감정과 생각이 울컥을 부추기면 울컥은 얼굴에까지 차오르고 일정량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울컥은 상승이지만 눈물은 하강이고, 그래서 눈물은 절정에 치솟은 어떤 감정이라도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해냄과 동시에 가라앉힌다.


눈물 자체만 봐도 추상적인 그 무엇인데, 또 다시 음악이라는 추상으로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에 새삼 인간이 보이는 어떤 특수한 메커니즘에 감탄하고 말았다. 나는 왜 가사도, 표정도 없는 오케스트라를 듣고 눈물을 흘렸을까? 그 눈물만 두고 따진다면 내 내면에 묵직하게 존재하는 어느 냉동실 구석에, 무관심하게 박혀있던 얼음 알갱이들이 음악이 흘러나오자 냉동실 문이 열리고 어느새 봄날이 돼버린 마음속 들판으로 뛰어내린 것 같다. 얼음 알갱이들은 산뜻하게 녹아내렸고 나는 눈물 두방울을 흘리고 말았다. 그것은 평소에 전혀 건드리지 않는, 그러니깐 굳이 의식하지 않으며 지냈고 애써 의식하기도 어려운 영역에 있는 감정들인 것이다. 누군가 작곡해서 누군가 지휘하고 누군가 부른 처음 듣는 음악이 어떻게 내 마음속을 파고들어 냉동실 문을 열었단 말인가. 새삼 음악에 대해, 인간의 감정에 대해, 인류의 기묘함에 대해 신비로운 마음이 생겼다. 솔직히 말해 그 얼음 알갱이들은 제자리에 있어도 내게 아무런 상관도 없다. 아니 없었다. 하지만 한번 세상 밖으로(그것도 봄날의 세상) 나오고 차갑고 딱딱하고 지저분한 얼음 알갱이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방울로 바뀌자 나는 또 어디 구석에 얼어있는 알갱이가 없는지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음악을 듣던 때의 감각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확실히 이어폰에서 전파 변환으로 흘러나오는 소리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이어폰은 1차원적인 시간의 소리지만 라이브 공연은 시간적이기도 하며 공간적이기도 하다. 지휘자의 몸짓에 따라 연주자의 숨과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고 악기를 거쳐 소리로 튀어나온다. 소리는 청중들을 향해 빠르게 퍼져나가며 사라지면서 다시 생긴다. 나는 그 소리가 팔과 손과 숨이라는 물리적인 형태에서 비롯된 뚜렷한 물질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인다. 라이브 공연의 음악은 또한 청각적이면서 시각적이기도 하다. 연주하는 모습을 보는 시각뿐만 아니라 소리가 보여주는 어떤 풍경. 그 풍경은 또 음들이 화려하게 그려나가는 여러줄의 선이기도 하고, 감정과 스토리가 만들어내는 꿈속의 정경이기도 하다. 어쩌면 합주를 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 그려가는 일체화된 그림에 잠시 발을 담구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내가 흘린 눈물이 꼭 음악적인 감동만으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보여낸 기적같은 일에 동참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감동에도 커다란 영향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던 감각을 떠올려본다. 평소에는 내 몸에서 좀처럼 지각되지 않는 여러 부위에서 전율이 흐른다. 음악이 더 흘러나오고 격렬해질수록 그 부위는 더욱 짜릿해지고 범위도 급격하게 넓어진다. 그 전율은 음악이 절정으로 치닫자, 마치 물줄기처럼 한곳으로 빠르게 모여 등줄기를 타고 상승한다. 어깨로 빠져나가는 전율도 있지만 목을 타고 얼굴까지 치닫는 전율도 있다. 여기서 눈이 뜨거워지고, 음악은 아직 더 많은 것이 남아있어서 후발 주자의 전율과 울컥이 다시 얼굴로 차오른다. 곧 컵에 물이 가득 차고, 어쩔 수 없이 눈물이라는 것이 흘러나온다. 막을 길이 없다. 이 전율은 마치 영혼이 느끼는 오르가즘 같다. 이 울음은 영혼의 사정이고, 이 눈물은 영혼의 정액이다. 저속한 표현이지만 나는 그것 말고 도저히 다른 은유를 찾을 수 없다. 나로서는 너무나 절묘한 은유라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나는 시월의 한 음악회에서 잊지 못할 첫경험을 해버렸고, 죽음같은 잠에서 삶의 한복판으로 어처구니없이 뛰어들게 된 오늘 같은 날에도 정신을 차리고는 곧장 음악회로 찾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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