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한 Oct 11. 2017

엉덩이 없는 시간과 적절한 맥주활용법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이다. 그럼에도 여지껏 음악 공연에 내 돈내고 한번도 참여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랍고 괘씸하고 부끄러운 감정이 있었는데, 다행히 이제 그 죄책감을 한시름 덜 수 있게 되었다. 김사월이 아니었으면 한동안 있는듯 없는듯한 죄책감에서 벗어날 길이 요원했을텐데 다행히 제때 그 티켓이 내 눈에 띄어주고 가격 장소 날짜 시간도 딱 적당해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작년 하반기는 거의 김사월의 목소리 속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틈만 나면 노래를 틀고 들었으니깐. 나는 그 노래들 안에 지난 감정을 담고 현재 진행중인 사건을 담고 또 그녀의 상상 속에서 나의 상상을 그려냈다. 심란하고 예민할 때 듣던 노래들이라 진한 액기스이고, 1년이 지난 지금 들으니 혹독한 발효과정을 거친 과실주처럼 깊은 맛이 난다. 그러니 나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맥주를 한잔 들이키고 갔다. 맨정신으로 가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공연장에 가니 음료 한잔을 공짜로 마실 수 있었다. 난 그것 역시 맥주로 골랐다. 한잔으로는 어쩐지 부족하다 싶은 거다. 소주 정도의 취기는 그녀와 공연을 온전히 감상하기에 곤란하지만 맥주 한잔의 가벼움으로는 어디로 샐지 모른다. 맥주 두잔의 중력쯤은 되어야 그 공연을 보다가 사라지지 않으리라. 무대에 놓여있는 기타와 마이크를 보며, 그것을 잡고 있을 그녀를 상상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건배는 없었지만 부드럽게 외롭지 않게 약간은 설레이며 마실 수 있었다. 두잔을 마시니 적당한 취기, 바람직한 중력을 득한다.


공연 시작 전, 좀 더 안정적인 관람 환경을 만들기 위해 화장실로 가는데, 공연장을 향해 들어오는 그녀와 단둘이 눈을 마주쳤다. 바로 알아보지는 못했는데 인삿말을 웅얼거리는 소리를 어렴풋이 듣고는 뒤늦게 눈치, 나도 인삿말을 중얼거렸다. 1년간 뭉쳐놓았다 흩뜨려놓았다를 수없이 반복한 환상의 결정체가, 방대하고도 산만한 환상의 제공자가 현실에 불쑥 튀어나오고 그것도 땅에 발을 밟고 움직이다니 무척이나 신기했다. 구름 정도의 모호함으로 그녀가 떠다니는듯 보였다.


제일 앞자리 가장 오른쪽 자리에 앉아서 입을 반쯤 벌리고 무언가에 홀린듯이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너무나 쉽게 드러나버렸지만) 총명한 눈빛이 스스로에게도 의식될 정도로 그녀를 바라보고 음악을 들었다. 흐릿한 시선이 무얼 보고있는지 궁금했다. 무릎이 조심스럽지만 산뜻하게 둥글리면서 리듬을 타는 모습이 좋았다. 음악과 음악 사이 어색한 호흡과 어색한 멘트는 귀엽고 달콤했다. 관객들 모두 엄빠 미소를 흩날리게 만드는. 노래를 듣고 있자니 엉덩이가 느껴지지 않는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멜로디와 상상과 회상들의 회전목마. 맥주 두잔의 중력은 노래 한소절 한소절에 금새 흩어지고 눈은 그녀를 바라보고, 귀는 그녀를 듣고, 몸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이 시간 속에서 엉덩이와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더라.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게 어떤 느낌이고 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지 짧게나마 깨달은 순간이었다. 잠시나마 모든 감각 생각 느낌 반응을 그녀에 초점 맞추니 내가 사라지는 가벼움이 살랑살랑 취하게 만든다. 이것은 짝사랑이긴 한데, 현실적(?)인 욕망이 전혀 없는 순수한 짝사랑이고 그래서 거부 당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안정적인 짝사랑이고 오히려 나의 짝사랑이 상대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기쁨이 되고 필요가 되는 상생하는 짝사랑이다.


짧은 공연이 끝났고, 나도 막차를 놓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맥주를 한잔 더 들고왔다. 소주를 마시기엔 여운이 완전히 사라질 꺼 같아서이다.


맥주 더하기 맥주

빼기 짝사랑의 공연

더하기 맥주

적절한 맥주활용법      



누군가 내게 꿈이 뭐냐고 장난스레 물어온다면

오늘부로 이렇게 요망하게 답하련다

"날 만나기 전에 맥주 두잔, 날 만난 이후에 맥주 한잔이 필요한 사람을 한명이라도 만드는 거요"

그녀는 내 기준에서 벌써 꿈을 이뤘다. 

작가의 이전글 추상적인 눈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