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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한 Oct 11. 2017

어디론가 영원히 걷고 싶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어디론가 영원히 걷고 싶은 밤이다'는 마음이 생겼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을 밤바람은 걸음에 리듬을 부여하나 보다. 이틀 전 같은 문장이 떠올랐을 때는 집에 누워 책이나 읽었으므로, 이번에는 정말로 어디론가 걸어야겠다. '어디론가'는 내가 여지껏 가보지 않은 장소면 되고, '영원히'는 몸이 적당히 움직이기 싫어질 때까지. 휴대폰은 방전되어 집에 놔두고, 저지티를 걸치고 지갑만 챙겨서는 나왔다.


방향을 정해야하는 갈림길에서는 단지 몸의 무게가 미묘하게 쏠리는 쪽으로 걸었다. 이곳에 산지도 이제 2년. 한 번도 안 가본 길을 찾으려면 꽤 걸어나가야한다. 처음보는 넓은 대로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나왔다. 대로변 어딘가에 포장마차가 있다면 잠깐 들려 소주 한 잔 걸치고, 바가 나온다면 칵테일도 좋다. 일요일 새벽 시간에 문을 연 가게는 흔치 않을테니 더더욱. 그치만 이 길은 너무도 한적했다. 거리를 밝혀놓는 건 띄엄띄엄있는 가로등과 주유소 뿐이었고, 자동차를 빼고는 사람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의 잔영과 소음을 받아넘기며 걷는데, 내 옆에서 '팅팅'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환히 불켜진 공중전화 박스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다. 두 박스 모두 전등 쪽에 거미줄이 넓직하게 쳐져있고, 통통한 거미 두 마리가 각각 매달려있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찾지 않을 공중전화 박스는 일요일 새벽 시간에 이상하리만치 정직하게 불이 밝혀져있고, 전화할 사람도, 관리할 사람도 없어 보이는 박스는 거미가 탐욕스럽게 독차지하고 있다. 걸음을 멈춰 한동안 그 기능 잃은 어정쩡한 공간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수화기를 부여잡고 누구라도 오랜 시간동안 전화하고 싶어졌다. 지금 내 주머니엔 휴대폰조차 없는 것이다.


떠오르는 번호가 딱 하나 있었는데, 얄궂게도 혹은 필연적으로 결코 전화하지 못할 단 하나의 번호다. 동전도 없다. 콜렉트콜을 하기엔 더욱 아닌 것 같다. 역시나 거미가 거슬린다. 지금은 일요일 새벽 한 시 반이다. 여러 변명꺼리가 빠르게 지나쳤지만 사실 그녀라는 이유 하나뿐이었다. 나는 우리 관계에 더 이상 지저분하고 끈적거리는 흔적을 남기기 싫다. 이미 그런 것들로 충분히 얼룩져있으니까. 그녀가 혹시라도 나를 추측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찝찝하고, 나의 존재를 떠올리지도 못한다면 그것 또한 비참하다.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걷다가 공중전화가 하나 더 나온다면, 그 사이에 나온 편의점에서 동전을 바꾸고, 그때 해도 늦지 않다. 새벽 한 시 반에도 잠들지 못했다면 새벽 세 시에도 깨어있겠지. 거기에서 마저 전화를 하지 못한다 해도 돌아오는 길에 몇번의 기회가 더 있다. 모든 기회와 변명을 집요하게 따져보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 전화 통화는 환한 전등밑에서 잠 못드는 거미가 지어낸 가상 시나리오일 뿐이고, 그 번호는 거미줄에 붙잡힌 창백한 번호라는 걸. 걸음에 스치는 가을 바람이 공중전화 박스 안까지는 불어오지 못한다는 걸.


텅 빈 새벽 속 단 하나의 인간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긴다. 사람 없는 거리. 어느 대학교에 들어가보았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다. 어떤 건물에는 불이 들어와있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꿈에서도 항상 사람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끈질기게 혼자군. 어디론가 영원히 걷고 싶은 밤은 그렇게 자취를 감췄고, 나는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떠있는 줄 몰랐던 커다란 주황색 달이 흐린 하늘에 딱딱하게 굳어있다. 구름도 달을 가리고, 나뭇잎도 달을 가리고, 눈꺼풀도 달을 가린다. 아까 만난 고양이는 홀연히 사라졌고 공중전화박스는 여전히 어둠을 꿋꿋이 버티고 서있다.


새벽 3시 집에 도착한다. 나는 충전된 휴대폰을 부여잡고 낯익은 얼굴들을 다급히 훑는다. 평소에 자주 듣는 노래를 큰소리로 틀어 놓는다. 불을 끄고 그대로 누워 눈을 감는다. 내일이 또 다가오겠지, 어둠속에서 체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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