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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한 Oct 11. 2017

10년 동안의 짝사랑

지난 겨울을 마지막으로 초여름이 되어서야 오랜만에 부산에 들렸다.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까운 역에서 내렸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나는 익숙한 뒷모습과 걸음걸이를 가진 어떤 여자를 바라본다. 익숙한? 그렇다 그것은 아마 엊그제 봤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익숙한 모습이었다. 나는 단번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았다. 아마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마주한지(일방적으로 바라본 게 아니라) 10년 가까이 지나버린 때늦은 어느 날. 조금 빨리 걸어가 옆모습을, 그녀의 눈빛과 표정과 피부를 보았고 나는 더욱 확신한다. 아니다, 여기에서 나는 확신을 넘어 어떤 진실에 당면한 것이다. 그녀가 그녀라는 진실. 조금 더 빨리 걸어가 그녀를 앞질렀지만 나는 차마 그녀의 앞모습까지 쳐다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빠른 걸음으로 집까지 내리 걸어갔다.


왜 용기가 나지 않았을까? 부자연스럽게 몸을 뒤틀어 정면으로 마주칠지도 모를 어떤 눈빛이 나는 두려웠을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 진실이 실은 거짓일 확률이 사라지는 것에서 이상한 공포를 느꼈을지 모른다. 아니면 그 진실이 나의 과대망상에서 비롯된 명백한 거짓이라는 걸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르고. 나는 그녀가 그녀라는 진실을 한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그녀가 그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강한 의혹도 동등한 입장에서 받아들인다. 두 가지 경우의 수가 팽팽하게 대립하지만, 나는 그 대립을 이완된 상태에서 자연스러운 질서로 수긍한다. 이 모순은 부딪힐 일 없이 얌전히 전시된 창과 방패다.


내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그녀는 아마도 우리가 고등학생 때인 여름 어느 화창하고 더운 날이다. 지하철에 느닷없이 나타난 그녀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고, 내 앞에서 특유의 걸음걸이로 살랑살랑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도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확신했고, 매혹된 벌처럼 꿈꾸듯 그녀에 이끌린다. 그녀가 카드를 찍고 지하철을 타러 들어가는 순간 나는 옆모습을 보았고, 그때도 어쩔 수 없는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그때도 그녀였다. 나는 그때도 그녀의 이름을 입밖으로 내지 못했고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런 미련도 의문도 없이 한층 더 지하로 스륵 사라진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그녀를 은밀히 만나오고 있었다. 그 만남은 거의 매일매일이었고, 만남의 장소는 밤의 침대맡이다. 군대에서도 잠들기 전이면 그녀를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리워했다. 꿈에서 그녀를 만나는 날이면 (당연하게도) 언제나 설렜다. 어느 순간 문득 생각해보니 그녀는 나라는 인간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갈지에 대해 능숙하게 설계를 마쳐 놓은 상태였다. 나는 그녀를 생각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살아갈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내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바다가 있는 곳에 가면 바다가 있고, 산이 있는 곳에 가면 산이 있듯이, 그녀가 있는 곳에 가면 그녀가 있다. 바다와 산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시간의 퇴적물로서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당당하게 그곳에 서있다.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꺼낸다면 눈이 커지고 어리둥절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관계의 비대칭성에 깜짝 놀라 조금 무서워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런 얘기를 결코 꺼내지 못하겠지만.


상상으로 꿈으로 너무 자주 만나온 탓에 현실에서 우연히 만나는 일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받아들일 지경이다. 차라리 그 간절함이나 빈도에 비해 가혹할 만큼 적게 나타났다는 탄식이 나올 정도다. 꿈과 상상과 현실의 경계는 기묘하게 일그러졌고, 현실에서 만난 그녀도 나는 상상이거나 꿈일까봐 그 진실 혹은 거짓을 과감하게 깨뜨리지 못한다. 그저 가능성으로 남겨둔 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이다. 가능성이라는 세 글자 속에 그녀를 박제하는 편이 그나마 가장 안전하다.


오랜만에 만난 부산 친구와 술을 마시고 얘기를 나누다가 습관처럼 인스타그램을 확인했다. 아까 그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제일 처음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정말 그녀였던 것이다. 진실은 진실로 굳어졌고, 나의 지난 모든 가능성들 또한 진실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100퍼센트의 진실이 진짜 진실이 된 순간 나는 그것을 순수하게 신기해한다. 우리는 오랜만에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목격담을 들려주었고, 우리는 서로를 신기해하고 반가워하며 불확실한 만남을 약속한다. 


나는 그 만남이 정말로 현실이 될지 이번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쪽에 서있다. 

만약에 정말로 만난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번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쪽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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