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박변: 무언가 더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드는 책

<그냥, 사람> 홍은전 작가

by 뉴욕박변

작가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은 현실 속에 수많은 문제들을 기어코 끄집어낸다.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고, 욕을 하고, 못 본 척 눈을 감고, 그렇게 따지면, 억울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겠냐며 화를 내기도 한다.


대부분의, 모든 문제에는 해결책이 있지만, 그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부터가 시작이 아닐까 한다. 한 문장씩 읽어내려가다가, 잠깐 멈추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만일,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이 책을 모두 한 번씩 읽어보면 어떨까, 아예 학교에서 교과서로 채택하면 어떨까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목소리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내 문제가 아니라며 눈을 감고 살아가는 대다수 우리를 위해 이 책을 내 주신 홍은전 작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나는 사고로 장애인 1급인 아버지가 있지만, 한 번도 장애인 등급제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고기를 좋아하지만, 줄였으니 괜찮아 생각했었지, 내가 삼시 세끼 맛있는 밥을 먹겠다고, 정말 그것 때문에 일상적으로 고문당하고 살해되고 분쇄되는 동물들의 고통에 눈 감았다. 이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께 꼭 한 번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학교는 교육을 하는 곳이고 교실은 재학생을 위한 것이며 죽은 이들의 흔적을 그대로 두는 것은 재학생들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은 추모를 포함해야 하고, 재학생을 위해서라도 교실은 반드시 보존해야 하며, 희생자들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버린 교실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진행되는 입시교육이란 더욱 가혹한 것이라고. '416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교육과 추모를 분리하는 것'이라고 학교는 말하지만 유가족은 알고 있다. '당신들은 구조를 모른다'라고 팽목항에서 유가족을 가로막던 이들이, '당신들은 법을 모른다'며 국회에서 유가족을 모욕했던 이들이 이제 학교 앞으로 몰려왔을 뿐이라는 걸. 아무도 죽이지 않았는데 모두가 죽은 것처럼 누구도 지우지 않았는데 도처에서 세월호는 사라지고 있다."(36 페이지)


출근하며 지나는 911 테러로 폭파된 쌍둥이 빌딩 자리에 세워진, Freedom Tower와 추모 박물관을 생각한다. 그때 가족을 잃은 남은 가족들이 이 박물관에서 주말에 투어를 해 주기도 한다. 세월호는 남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일이기에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한다. 세월호로 자식을 잃은 두 아버님이 뉴욕에 왔을 때도, 이 얘기가 나왔었다. 그들을 추모할 공간을 만드는 당연한 것을, 땅값과 집값으로 계산하게 만들어 버리는 비상식이 상식이 된 세상이다.


"세월호가 갑자기 기울었던 그 아침, 조태준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객실을 빠져나왔다. 그때 복도에서 울고 있는 꼬마 오누이를 보았고 남자아이에게 다가가 안아주었다. "형, 우리 죽어요?"라고 묻는 아이를 달래며 약속했다. "아니야, 형아가 너를 살릴게."... 그가 여동생을 끌어올리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동안, 배는 더 가라앉았고, 오빠의 차례가 되었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아무리 뻗어도 손이 닿지 않았다. 순간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살아 돌아간다 해도 그를 기다리는 건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는 세계. 사는 것도 어차피 지옥이었다. 그는 붙들고 있던 난간을 가만히 놓았다. 그러나 그때 구명조끼가 벗겨질 듯 위태로운 한 여학생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여학생을 안고 올라와 마지막으로 구조되었다... 나는 죄책감이란 것이 '먼저 달아난 사람'의 감정인 줄로만 여겼는데 그것이 '누군가를 구하려다 실패한 사람'의 것일수록 더욱 고통스럽고 지독할 수 있음을 알았다." (62 페이지).


삼풍 백화점 참사 때, 현장에 있었던 소방대원분이 깔려 있던 분을 구조하지 못하고 그분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던 경험을 얘기했었다. 더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다 결국 그만두셨다고 했다.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참전 군인, 소방관, 경찰관, 그분들의 치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강자가 사라져야 약자가 사라질 거라고 말한다. 나는 순서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심장이 아니다. 가장 아픈 곳이다. 이 사회가 이토록 형편없이 망가진 이유, 그것은 혹시 우리를 버려서가 아닌가. 장애인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버리고, 병든 노인들을 버려서가 아닌가. 그들은 가장 먼저 위험을 감지한 사람들, 이 세상의 브레이크 같은 존재들이다. 속도를 낮추고 상처를 돌보았어야 한다. 상처 난 곳으로 온갖 악한 것들이 꿀처럼 스며드는 법이다." (99페이지).


진정한 사회 복지란, 가장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 가난한 사람들, 병든 노인들을 먼저 돌보는 것이다. 하지만, 나부터도 장애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없었고, 가난한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 가난의 깊은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가늠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가 유튜브를 볼 수 있으니, 양질의 교육 콘텐츠를 제공하면, 그 간격을 메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가난'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너무 가난해서 10살도 되기 전에 기차역에서 껌팔이, 신문팔이, 구두닦이를 하던 소년들이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감금되고, 그 소년들의 머릿수가 누군가의 실적이 되었다. 집이 있다고 아우성쳐도, 그들은 안산시 선감도에 있는 선감학원으로 보내졌고, 집에 보내 달라고 애원하던 소년들은 모진 매질을 당했고, 지옥섬에서 한겨울에 바다에 들어가 내가 먹었을지 모를 굴을 캤고, 밤낮없이 뽕잎을 따다 누에를 먹였고, 어린아이가 오줌을 싸면 아이를 거꾸로 들어 맨바닥에 머리를 쳤고, 어떤 날은 과자를 준다며 아이들을 모아놓고 신나게 두들겨 팼단다. 이 믿기 힘든 이야기는, 1982년까지 합법적으로 경기도가 직접 운영한 선감학원이란다. '불량 행위'를 하는 자들을 교화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빈민들을 추방하고 격리하기 위함이었단다.


"해마다 300명이 넘는 홈리스와 천 명이 넘는 무연고자들이 외롭게 죽아가는 이 거리에서, 집 없는 이들에게 주거비를 지원하는 데엔 고작 26억을 쓰면서 이들을 추방해 격리하는 수용시설에는 237억의 예산을 쓰는 이 현실에서, 촛불은 어디까지 왔나." (159페이지).


뉴욕 브롱스 검찰청 2차 면접에서 받았던 질문이다. '만일 불법 이민자가 길거리에서 마약을 판매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을 체포했다면, 형량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나?'였다. 나는 '법은 만인에게 공평하게 적용돼야 한다. 따라서, 그 사람은 마약을 판매한 미국인과 같은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를 추방시킨다면, 남은 가족들은 아버지 없는, 남편이 없는 삶을 살게 되고, 결국은 공공자원에 의지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형법을 위반한 것에 대한 형벌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대답했고 보기 좋게 떨어졌다.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이중에는 내가 변호를 맡았던 15살짜리 소녀도 있다. 학교가 쉬는 날인데, 학생 교통권을 이용해 잡 인터뷰를 갔는데 그게 불법이라 하루 저녁 수감이 되었고, 수감이 되는 바람에 통금 시간을 지키지 않아, 홈리스 쉘터에서도 쫓겨났었다)을 감옥에 가두는 것은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은 여전히 같다. 그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을 여행할 때였다. 값싼 숙소에 한데 뒤섞여 지낸 각국의 여행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영어를 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스페인에 사는 현지인이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조차 불만이었다. 남의 나라에 와서도 자기 나라 말을 요구하는 자들의 그 엄청난 권능이 부럽고도 싫었다. 그땐 그것이 '남자로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는 그 무지함이 평생의 내가 그랬듯,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걸 깨닫는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꿈도 꾸지 못할 자유를 아무 노력 없이 누리면서도 일상의 작은 불편조차 장애인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그들을 격리하고 가두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164페이지).


20대 초반, 파리에 처음 갔었을 때, 베르사유 궁에 가려고 표를 사려는데, 역에 있는 프랑스 아저씨는 계속해서 프랑스어로만 뭐라고 뭐라고 했다. 나는 너무 당당하게, 영어로 계속 물었고 그게 부끄럽다고도 생각을 못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역 이름이 같지만, 하나는 기차표를 사는 곳이 있었고 지하철 표를 사는 곳은 다른 곳에 있어서 한참을 헤매다 지나가는 영국 방문객들에게 물어서 찾아갔던 기억이다. 이제는 그랬던 기억이 부끄럽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가 "망월동에 한열이를 묻어놓고 돌아와, 1년간 현관에 불을 못 껐어요"라고 말하자, 진행자인 예은 아빠 유경근 씨가 말을 잇는다. "저는 아직도 아파트 비밀번호를 못 바꿨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말한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걸 뺏꼈는데, 그보다 중한 게 뭣 있다고 비밀번호를 바꾸겠어요. 나는 대문도 못 닫았습니다. 아직 들어오지 않는 아이가 있으니." 30년 전 아들을 잃은 팔순 여인의 메마른 목소리가 4년 전 딸을 잃은 중년 남자의 젖은 목소리를 감싼다. "그쪽은 나보다 젊어 당했으니 더 오래 힘들겠구먼." 이것은 그녀가 30년 전 젊은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 (174페이지)


슬픔이라는 단어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다큐 <어른이 되면>을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혜영은 오전에는 동생의 교실에 있다가 동생의 수업이 끝나면 자기 반으로 가 수업을 들었다. 혜영이 중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 동생은 시설로 보내졌다. 언니의 삶을 위해서,라고 했다. 시간이 흘러 언니는 깨달았다. 누군가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을 이유로 갑자기 사라져 버릴 수 있다면 남아 있는 삶 역시 온전히 그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언니 혜영은 말한다. "혜정이와 같이 살기 위해서는 두 개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는 나의 시간이고 하나는 혜정이 언니의 시간이다. 혜정이를 시설로 보낸 대가로 얻어진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전재로 하는 진짜 나의 시간을 찾고 싶다." (192페이지)


변호사인 아는 언니는 의사인 연하남과 결혼을 했고, 첫 딸에게 나와 영어 스펠링까지 같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시간이 지나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장애가 있다. 언니가 올리는 사진 속에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그 어린 딸아이에게 일찍부터 주어지는 삶의 책임에 대해 생각했었다. 나라면,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둘째를 낳았을까? 내가 사는 동안에는 내가 책임을 지지만, 내가 죽고 나서를 책임질 수 없는데 그런데도 낳는다면 그게 오히려 무책임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얘기를 하자, 내 친구는 그 아이가 내가 죽고도 충분히 돌봄을 잘 받을 수 있을 만큼 돈을 벌어놓고 죽으면 되지 않냐고 했다. 결국, 오지 않을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것보다, 현실에 닥쳤을 때 그 상황을 받아들이면 되는 게 아니겠냐고.


"서울 지하철 신길역에서 한경덕 씨가 사망했다. 버튼의 위치 때문이라고 했다. 베트남전 상이군인이었던 그는 1986년 교통사고까지 당해 하반신과 왼팔이 마비되었다. 1호선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려던 그의 앞에 절벽과도 같은 계단이 나타났다. 리프트를 타기 위해서는 역무원을 호출해야 했다. 버튼은 절벽 앞에서 조그맣게 빛나고 있었다. 왼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위치였지만 그는 왼팔을 쓰지 못했다. 오른팔을 버튼 가까이 밀착시키기 위해 그는 낭떠러지 같은 계단을 등진 채 휠체어를 조심조심 후진시켰고, 순간 동그란 바퀴가 각진 모서리를 벗어났다. 그의 몸은 지난 10년간 동고동락을 같이 해온 육중한 중고 독일제 전동휠체어와 함께 낭떠라지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그는 98일 후 세상을 떠났다... 리프트를 철거하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는 ,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겠다는 이 '사소한' 투쟁은, 실은 그것이 얼마나 사소하지 않은지를 증명하듯 17년간 계속되고 있다... 장애인이 죽고 다치는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고는 반복되었다."(197-199페이지).


그러고 보니, 한국 지하철 계단에서 위태롭게 보이던 장애인 휠체어 리프트가 떠올랐다. 내 아버지가 그 리프트를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병원에만 누워 있는 아버지가 전동 휠체어로 움직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꿈꿨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교통사고 당신 눈의 신경이 끊어지는 바람에 물체가 여러 개로 보여 그건 힘들다고 했다. 무려 17년 간이라니... 바뀌어야 한다. 이런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사실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청의 하청의 하청인 노동자들이 마감 기한에 쪼여 안전장치도 없이 높은 곳에 올라가고 화학물질 가득한 좁은 공간 속으로 몸을 구겨 들어갈 때 그들을 버티게 하는 것은 배에 대한 애정도, 회사에 대한 애정도 아니었다. 오직 '개같이' 번 돈으로 가족의 생계를 부양 한다는 자부심뿐이었는데, 사고 후 산재를 신청하자 공짜로 나랏돈 바라는 기생충 취급을 받으며 그마저도 짓밟히고 말았다... 나에게 그 사실을 깨우쳐 준 '진짜 노동자'는 이렇게 말 한 뒤 돌아갔다. "용접은 이제 안 하려고요. 그 일은 몸과 시간을 갈아서 돈으로 바꾸는 일이에요." (259-260페이지).


나는 중환자실에 실려 온 산재 환자들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요즘에는 산재 사건을 다룬다. 우리가 매일 지나다니는 다리를 짓다가 다쳐서 온 사람들이 소송을 하면, 반대편에서 정부나 회사의 변호를 한다. 실제로 책임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재판에 가지 않는다. 빨리 시인하고 합의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경우는 스스로 발에 걸려 넘어져 놓고, 더 이상 일생생활도 어렵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일상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도 재판에 가지 않는다. 증거를 들이대면 대부분 시인을 한다. 나머지 재판에 가는 산재 케이스는 길게는 9년이 넘게 진행이 되기도 한다. 내가 하는 매일의 업무를 빨리 빈틈없이 진행할수록, 다친 분들과 가족들의 삶이 빨리 정리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당화 인지도 모르겠다.


"정신장애인 시설은 동물원이 아니라 교도소에 더 가깝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들의 장애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전시에 적합하지 않고, 전시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철저히 가려 있었다. '아버지는 늙었고 동생들과는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연쇄살인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320페이지).


나도 그러고 있지 않은가. 내가 내 삶을 살겠다고, 너희는 너희 삶을 찾아가라는 엄마 말에 망설임 없이 나는 다시 미국으로 와 로스쿨에 갔다. 늦어진 나의 10년을, 가족과 떨어져 병원에서 지낸 아빠의 20년보다 더 많이 생각하면서 살았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끝나면, 꼭 한국에 다녀와야지. 아빠를 보고 와야지. 요양병원에 '버려진' 내 할머니를 보고 와야지 생각한다. 아빠를 생각하면, 인생이 허무하다는 마음이 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울컥울컥해,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한 고민이 들 때마다, 나는 이 책을 꼭꼭 씹어 읽을 계획이다.


#뉴욕박변 #그냥사람 #홍은전작가 #봄날의책 #인권 #함께사는세상 #장애인 #세월호 #장애인리프트 #노동자 #독후감 #북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