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올해 클럽 안 갔지?”
회의 중 팀장님이 나에게 한 첫마디다. 코로나 확진자가 급격히 늘어, 젊고 활동량이 많은 사원들에게 주의 사항을 전파하고자 만든 자리였다. 나는 회사 사람들에게 내 사생활을 말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부장님은 나에게만 저 질문을 던지셨다. 내가 제일 젊은 직원 이어서일까, 아니면 노는 걸 좋아하게 생겨서일까.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남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이런 착각은 굉장히 흔하다. 어떤 이들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고 자부하며 인간을 분류하기도 한다. ”너 같은 애들 많이 봤어. “라는 말은 이런 사람들의 전형적인 말버릇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여자 친구가 뭘 먹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는 걸까? 사람은 모두 제각각이다. 정말이지 똑같은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일란성쌍둥이마저도 외모와 취향이 다른데, 우리는 왜 사람을 마음대로 판단 내리려 하는 것일까?
인간을 유형화하는 이유는 편리함이다. 무엇이든 기준에 따라 분류해두면,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배워나갈 때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도 도서관의 책들처럼 도서 기호를 붙이고 비슷한 사람을 같은 군으로 분류한다. 경제를 잘 알고 있는 얘는 사회 과학. 체크 셔츠를 입고 있는 저 찐따는 과학, 화려한 옷을 입은 너는 예술. 신기하게도 이런 구분은 상대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같은 집단의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가 한 사람의 모든 인생을 대표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같은 음악을 듣고 있어도, 느끼는 것은 다르다. 같은 영화를 봐도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이 인간이다. 한 개인은 타인과 절대 같아질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선 부부 싸움이 이렇게나 많은 것을 설명할 순 없다. 나와 다른 타인을 잘 알고 이해하기 위해선,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우주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나? 난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의 나는 미래의 자신이 글 쓰는 걸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인생을 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때의 나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고등학생’이었다. 커서 뭐가 될지도 모르며 수능 공부나 하던 병신이었다는 말이다. 바꿔 말해 개성이라곤 없는 공산품에 가까웠달까. 사회는 내 성적이 좋을수록 더 좋은 제품으로 취급하였기에,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은 없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싫어서 대학을 진학한 뒤로는 많은 도전을 했다. ‘공대생 답지 않게’ 심리학을 좋아했고, 많은 사람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대규모 강연을 다녀보기도 하고, 학교를 대표해보기도 했다. 주위에선 공대생 주제에 뭘 그렇게 하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지금은 이런 나를 부러워하는 눈빛도 더러 있다.
나는 2년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진로 강연을 다녔었다. 학생들을 만나면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은 단연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어떡하면 알 수 있나요? “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를 잘 알기 위해선 많은 것들을 경험해보는 방법 말고는 없는 것 같다. 본인이 민초단인지 알려면 민초를 먹어야 한다. 발라드를 좋아하는지 알려면 들어야 한다. 외향적인지 내향적인지는 사람들과 어울려 봐야 한다. 연애를 함에도, 인생을 살아감에도, 죽음을 대하는 자세도, 모두 경험을 통해 알아가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삶은 경험의 연속이다. 자아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 지 20년이 넘어가는 우리들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방황한다. 1만 시간을 한 분야에 투자하면 전문가가 된다는데, 우리는 아직도 ‘나’라는 사람의 전문가가 되지 못했다. 테스 형이 말한 격언은 나에겐 참 어려운 과제인가 보다. 과연 이런 우리는 타인을 잘 알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팀장님께 이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 ”부장님이나 가족한테 잘하십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