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처럼
루리코인을 가는 방법은 에이덴[叡電:叡山電鉄]과 버스가 있는데 이번엔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라시야마에서 루리코인을 가기엔 환승이 버스가 편리한데다 루리코인을 들렀다 오하라까지 가려면 여러 면에서 버스가 유용하다. 교토의 지하철/ 버스 1일 승차권을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때가 오하라[小原]를 갈 때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온전히 여행으로 교토를 즐길 땐 몰랐는데 교토의 교통비가 은근 비싼 편이다. 마음먹고 하루 종일 관광 모드로 보낼 때가 아니면 이젠 쉽게 구입하게 되지 않는 1일 승차권, 오랜만에 손에 쥐고 있으니 교토의 모든 걸 가진 것처럼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루리코인은 봄과 여름 가을 특별 개방을 한다. 봄은 푸르름으로 가득 찬 풍경을, 가을은 기품 있는 색을 입은 풍경을 즐길 수 있는데 이전 봄에 왔을 때의 그 푸릇하고 신비로운 느낌이 참 좋았었다. 루리코인에 들어서니 그때 가을이면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고 안내원이 알려주었던 기억을 되살아나 살짝 가슴이 뛰었다.
입구를 들어서 본채로 올라가는 이슬을 먹은 오솔길이 굉장히 운치 있지만, 이 시즌 루리코인을 방문하는 관람객이 많기 때문에 마음껏 즐기기도 그렇지만 사진에 담기도 만만치 않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을 내려놔야 한다. 아름다운 풍경과 가을의 정서를 즐긴다기보다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파에 휩쓸린 사진촬영 대회 같은 느낌이랄까, 어쩜 루브르박물관에서 모나리자 사진을 찍는 많은 사람의 모습과 조금 닮지 않았나 싶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예쁜 풍경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 순간 그 구성원의 하나였던 나 역시 똑같이 어떻게든 사람들의 번잡함을 도려내고 루리코인 본연의 정취를 상상하며 풍경을 담아보려 애썼다. 어쩜 이것이 루리코인에서 가을 즐기는 방식 혹은 재미라면 재미일지 모르겠다.
청량한 물소와 사각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 그리고 옅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여러 나라의 언어와 셔터 누르는 소리에 뒤섞여 어디론가 흩어진다.
루리코인의 메인은 본채의 2층에서 바라보는 단풍 풍경. 거울 같은 검은 우루시 테이블에 반사된 가을 색을 입은 나무들의 모습이 2층에 들어선 순간 온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은 흥분한다.
저쪽은 몽환적 풍경, 이쪽은 그 풍경을 담기 위해 몸부림치는 치열한 전쟁터. 그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단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몸짓으로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안내원들. 이 모든 전체 풍경이 루리코인의 리얼한 현실이지만, 그 풍경은 차마 사진에 담지 않았다. (사진에서만이라도 그 혼잡함은 잊고 싶어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 역시 어떻게든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멋진 사진 한 장 담아내려 온갖 애를 다 쓴다. 그럼에도 불구 하도 절대 담기지 않는 풍경.
서로 양보하고 협력해서 사진을 찍으라는 다정한 안내를 몇 번이고 들으며 미로 속을 따라 걷듯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다. 2층에서 보는 풍경과는 또 다른 느낌의 눈높이 정원.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내려온 느낌이랄까, 번잡함이 조금 사그라든 느낌이랄까, 모두들 2층에서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는지 그제야 앉아서 정원을 감상하는 여유를 즐기는 듯했다. 물론 나도 더불어.
깊이 있는 색감, 강렬하지 않아 오히려 더 기품 있는 아름다움. 이곳에서는 적당히 주위를 잊고 오로지 가을과 정원과 나만을 생각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만히 앉아 정원에 눈을 맞추자 그제야 아름다운 풍경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느릿하게 흘려보내고 싶은 시간.
루리코인의 곳곳엔 스쳐가듯 소박함이 느껴지는 공간이 있는데 그 작은 풍경들이 계절에 들떠 있는 마음을 차분해주는 것 같았다. 편안한 풍경.
소박한 아름다움과 평온함, 계절을 무심하게 만드는 작은 풍경들에 마음이 흔들린다.
반복되는 사진 찍기 양보 안내들 속에 특별히 개방하는 다실에서의 맛차 타임이 한자리 남았다는 소리가 귀가를 스쳤다. 나는 곧바로 하나 남았다는 자리를 예약했다. 일반 관람객이 들어갈 수 없게 막아놓은 문을 지나 소담스러운 다실로 안내를 받았다. 정원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각도로 창문을 열어둔 것이라는 말에 다시 한번 눈이 창을 향했다. 다실에는 양쪽으로 4개씩 총 8개의 방석이 놓여있고 사람들은 안내를 받아 한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창 너머 정원을 감상하며 차 시간을 가졌다.
잠깐의 잔잔함과 여유로움 그리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풍경에 상반된 서둘러 흘러가는 차 시간. 마음껏 사진을 찍으라는 친절한 말이 오히려 슬플게 다가왔던 묘한 겉핥기 시간. 그 짧은 시간 같이 차를 마셨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루리코인의 입장권에는 루이 이카르 미술관 입장권이 포함되어 있다 들었는데 지금 보니 원래 무료 관람인 것 같다. 예전 티켓을 구매할 때 안내받은 기억이 나 루리코인을 나온 발걸음이 자연스레 미술관으로 향했다.
한적하고 차분하고 평온한 미술관. 덕분에 묘하게 지쳤던 마음이 한숨 쉬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