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처럼
정신없이 가을에 취해 있었더니 어느새 겨울바람이 불어온다. 며칠 전 아침 눈을 떠 창문을 여니 옅은 눈발이 휘날렸다. 그 순간 모든 걸 멈추고 단풍나무 위 하얀 눈이 쌓인 환상적인 풍경을 상상하며 대충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옅은 눈발은 금세 더 옅어졌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맑아지고 파랗게 변했다. 그렇다. 어느새 이곳도 겨울이 시작되었다. 가을의 끝자락에 겨울 색이 입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밀린 가을 기록을 서둘러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시간을 거슬러올라 다시 가을의 한가운데로,
걷던 길을 또 걸어도 좋고 새로운 길을 발견해도 좋고. 그래도 가장 즐겨가는 산책 코스는 텐류지로 시작해 강가를 따라 걷다 전망대를 찍고 치쿠린으로 내려오는 코스. 익숙해진 아침 산책 길목에 단풍을 감상하기 좋은 곳이 또 한 곳 있다. 호곤인[宝厳院] 은 예전 여행 때 들렀던 적이 있다. 정원의 모습은 흐릿해졌지만 그윽하던 휘파람새의 지저귐과 그 소리를 들으며 마셨던 평온한 맛차는 여전히 기억에 생생한 곳.
단풍시즌이라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꽤 많았다. 일단 정원 감상은 뒤로 미루고 맛차를 먼저 즐기기로.
곱게 내리비추는 아침 햇살을 따라 안쪽으로.
예전에 앉았던 자리에 똑같이 다시 앉았다. 그때는 이곳을 혼자 독차지했던 기억이 난다. 평온한 시간, 이번엔 새소리 대신 멀리서 청소기 소리가 들려온다. 가을 아침 산책길에 즐겨듣는 소리다. 아름다운 아라시야마의 풍경을 위해 많은 이들이 아침마다 낙엽을 쓸거나 청소기의 도움을 빌리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내가 앉은 맞은편에도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것도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는 것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 저쪽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던 사람과 보이지 않는 눈인사를 나누며 함께 평온한 시간을.
맛차를 즐긴 후에는 아침 햇살 사이를 가로지르며 정원을 만끽했다.
다음은 발걸음을 옮겨 입장권을 살 때 공동 입장권이 있어 함께 구매한 코겐지[弘源寺]로. 오며 가며 스쳐지날 때마다 궁금했는데 안에는 아라시야마의 소박한 사계절을 세세히 담은 보물 같은 그림들이 있었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어쩜 그 덕분에 좀 더 깊이 감상할 수 있었는지도. 카메라가 있어 즐겁기도 하지만 카메라를 멈추니 또 다른 특별함이 있어 것도 좋았다.
한동안 텐류지 앞을 샛노란으로 빛내던 은행나무는 언제 이렇게 앙상한 가지만 남은 걸까. 조금씩 조금씩 겨울로 향하는 가을.
같은 날은 아니지만 아침 산책길에 니손인[二尊院]에도 들렀다. 이쪽 코스는 치쿠린에서 시작해 니손인을 찍은 다음 다시 치쿠린을 거쳐 아라시야마 공원을 들러 % 커피를 지나 텐류지로 돌아오는 코스, 사람들로 꽉 찬 치쿠린을 피하고 싶은 날을 위한 샛길도 발견해두었다.
니손인은 들어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양쪽에서 뒤덮은 새빨간 단풍나무길로 유명하지만 어느새 한쪽이 잎이 지기 시작했다.
대신 이때는 사쿠라 꽃비가 내려앉은 것처럼 길가를 뒤덮은 오치바[落ち葉]를 만끽할 수 있다.
니손인을 나오면 그 옆으로 작은 공원이 있는데 의외로 이곳도 한적해 걷기 좋다. 걷고 또 걷고.
다음은 치쿠린 쪽을 향해. 이쪽 길은 풍경 좋은 좁다란 시골길 같다. 가끔 자전거를 달리는 사람들도 눈에 띄고.
걷다가 문뜩 뒤돌아서 만난 풍경, 겨울이 곧바로 뒤를 쫓아오는 것 같지만, 이곳엔 여전히 새로운 가을이 가득하고.
같은 길을 매번 걸어도 달라지는 풍경. 대나무와 어우러진 단풍이 이토록 아름다울 줄이야.
우연히 발견한 행복의 순간.
お幸せに。
이날은 전망대까지 올라가지 않고 가볍게 공원만 한 바퀴 돌았다.
강가로 내려가는 길에서 쉼터도 하나 찜 해둔다. (다음번엔 텀블러에 모닝커피를 담아와야지)
지금은 또 다른 풍경이 되어있을, 내려오는 길에 만난 아름다운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