뮬러의 도시, 그리고 미국이라는 나라

정치의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떠오르는 워싱턴의 풍경들

by 에치피

로버트 뮬러라는 이름이 다시 뉴스에 떠올랐다. 특별검사로서 러시아 스캔들을 수사했던 그 사람. 미국 정치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그 이름 석 자가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 안다. 그리고 나는 문득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미국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워싱턴은 정치의 도시였다

처음 워싱턴 D.C.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 도시의 밀도에 압도됐다. 넓고 평탄한 길, 위압적인 신고전주의 건물들, 그리고 어디서나 들려오는 영어 속에 섞인 다양한 언어들. 그 도시는 권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장소였다.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 서서 나는 '이 나라가 실제로 굴러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미국을 여행할 때 많은 사람들이 뉴욕이나 LA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워싱턴은 다르다. 그곳은 관광지이기 이전에 살아있는 권력의 무대다. 스미소니언 박물관들은 무료로 열려있고, 링컨 기념관 앞에서는 누구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개방성 안에 얼마나 많은 갈등과 결정과 역사가 응축되어 있는지는, 뉴스를 며칠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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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를 이해하려면 미국을 걸어야 한다

뮬러 같은 인물이 왜 그토록 오래 화제가 되는지 - 한국에서 그 뉴스를 접하면서는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미국 땅을 밟고, 그곳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도시의 분위기를 느끼고 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미국인들에게 정치는 일상이다. 식당에서, 카페에서, 길거리에서 사람들은 정치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삶 방식이다.


나는 미국에서 택시를 탈 때 종종 그 나라의 실상을 들을 수 있었다. 운전기사들은 거침없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말했다. 한국이라면 낯선 승객에게 그런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을 텐데. 어쩌면 그 개방성이야말로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열쇠일지도 모른다. 요즘 택시 요금 인상이 화제인 한국과 달리, 미국의 택시와 우버 문화는 또 다른 사회적 맥락 안에 있다.



정치의 계절과 여행의 계절

미국을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언제일까. 단순히 날씨만 보자면 봄과 가을이 적당하다. 그러나 정치적 계절도 따진다면, 선거 전후는 그 나라의 민낯을 보기에 좋은 때다. 거리 곳곳에 내걸린 선거 현수막, TV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광고, 이웃 간의 팻말 전쟁. 그 모든 것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뮬러 수사가 한창이던 시절, 미국 친구들은 매일 뉴스를 확인하며 살았다고 했다. 한국도 비슷한 시절이 있었다. 정치가 일상을 잠식하는 그 감각은 어느 나라든 다르지 않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미국은 시끄럽게, 때로는 혼란스럽게 그 갈등을 드러낸다. 그 솔직함이 불편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럽기도 하다.



미국이라는 나라, 그 복잡함을 안고

미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종종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인다. 크게 실망하거나, 생각보다 좋았다거나. 나는 그 양극단의 어딘가에 서서 이 나라를 계속 생각한다. 뮬러라는 이름이 다시 뉴스에 뜨는 것처럼, 미국은 계속해서 이슈를 만들어내고, 세계는 그 이슈를 주시한다.


여행지로서 미국의 매력은 그 다양성에 있다. 뉴욕의 밀도, LA의 자유로움, 워싱턴의 무게감, 시골길의 고요함. 한 나라 안에 이 모든 것이 공존한다. 미국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나라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그 나라를 들여다본다.


뮬러의 이름을 보며 나는 워싱턴의 봄날을 떠올린다. 벚꽃이 피는 내셔널 몰, 포토맥 강변의 산책, 그리고 어디서나 들려오던 정치 이야기들. 그 기억은 뉴스 한 줄과 함께 불쑥 찾아와 나를 그 도시로 데려간다. 여행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살아난다.


일상 속 작은 번거로움들 - 예를 들어 택배 분실 대처봄철 화재 예방 같은 것들 - 을 챙기면서도 나는 머릿속 한켠에 워싱턴의 그 거리를 두고 있다. 언젠가 다시 가게 되면, 그때는 더 넓은 눈으로 그 나라를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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