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눅한 겨울밤의 위로
12월의 어느 날 저녁, 서울의 낡은 아파트 창가에서 밖은 0도였다. 얇은 겨울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누군가의 애타는 심장 박동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은 텅 빈 듯 고요했지만, 눅눅한 공기는 묘한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며칠 전부터 계속 내린 비로 촉촉해진 땅 냄새와 함께, 오래된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쿰쿰한 냄새가 뒤섞여 코를 간지럽혔다. 난 창밖을 바라보며 굴러다니는 담뱃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냉장고에서 마른 오징어 한 봉지를 꺼내 들었다. 마른 오징어 봉투를 뜯는 순간, 짭짤한 바다 내음이 온 방안에 퍼져 삭막했던 겨울 저녁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어릴 적 할머니가 해주시던 마른 오징어 볶음 냄새가 떠오르기도 했다. “또 오징어 먹고 싶어? 맨날 오징어만 먹으려고 하지.” 할머니는 항상 투덜거렸지만,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어릴 적부터 마른 오징어는 내게 단순한 간식을 넘어선 존재였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찾게 되는 위로의 대상이었다. 부모님의 다툼이 심했던 날이면, 뒷베란다에 나가 마른 오징어를 씹으며 눈물을 훔쳤다. 시험을 망쳤을 때, 친구에게 차였을 때, 짝사랑하는 이성에게 고백조차 하지 못했을 때, 마른 오징어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씹는 횟수마다 짭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동시에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때 마른 오징어, 그냥 안주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입니다라는 글을 읽은 게 문득 떠올랐다.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한국인의 삶과 애환을 담고 있는 문화 코드라는 설명이 왠지 뭉클하게 다가왔다.
오징어의 눅눅한 질감과 바삭한 겉면의 대비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씹을수록 쫀득쫀득한 식감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 주었고, 짭짤한 맛은 어른이 되어서 겪는 고독과 슬픔을 달래주는 듯했다. 문득, 마른 오징어 한 봉지를 다 먹고 남은 빈 봉투를 쥐어짜는 행동 자체가, 세상의 모든 슬픔을 쥐어짜고 싶다는 엉뚱한 욕망의 표현인 것 같기도 했다. 방 안의 온도가 점점 더 내려가는 것 같았지만, 마른 오징어 덕분에 왠지 모르게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빗소리에 섞여 마른 오징어 씹는 소리를 감상했다.
며칠 뒤, 나는 친구와 함께 집에서 농구 경기를 보기로 했다. 1월의 어느 늦은 오후, 밖은 영하 5도였다. 창밖에는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꿋꿋하게 서 있었고, 썰매 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팝콘을 튀기면서, 냉장고에서 또다시 마른 오징어 한 봉지를 꺼내 들었다. 친구는 TV 속 선수들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나는 마른 오징어를 뜯으며 그 옆에서 낄낄거렸다. "아, 너 또 마른 오징어 먹어? 맨날 먹어." 친구는 투덜거렸지만, 그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TV에서는 경기 해설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관중들의 함성이 귓가를 때렸다. 팝콘 냄새와 마른 오징어 냄새가 뒤섞여 코를 간지럽혔다.
경기는 점점 더 치열해졌고, 나는 긴장감에 휩싸여 마른 오징어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쫀득쫀득한 오징어의 식감은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고, 짭짤한 맛은 입안을 즐겁게 해주었다. 서울 SK vs 고양 소노 농구 중계 일정를 틀어두고 오징어를 뜯었다. 내가 코트 위에 있는 것 수준으로 느껴졌다. 친구는 눈을 뗄 새 없이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나는 마른 오징어 씹는 소리에 집중했다. 팝콘 튀기는 소리, TV 속 중계 소리, 그리고 오징어 씹는 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하나로 섞여 묘한 공감을 이루었다.
경기가 끝난 후, 친구는 승리의 기쁨에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나는 빈 마른 오징어 봉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텅 빈 방 안에는 팝콘 냄새와 마른 오징어 냄새만이 가득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앙상한 겨울나무들을 쳐다보았다. 비록 경기는 끝났지만, 내 마음속의 갈증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냉장고로 향했다. 또다시 마른 오징어 한 봉지를 꺼내 들었다. 씹는 횟수마다 짭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동시에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며칠 뒤, 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마른 오징어 먹는 방식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목격했다. 어떤 사람들은 오징어를 가로로 썰어 먹는 것을 선호했고, 어떤 사람들은 세로로 썰어 먹는 것을 선호했다. 어떤 사람들은 마요네즈에 찍어 먹는 것을 좋아했고, 어떤 사람들은 초장에 찍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심지어는 오징어 젓갈을 만들어 먹는 사람도 있었다. 밖은 1월의 추위가 매섭게 불어왔지만, 온라인 커뮤니티는 온통 열기로 가득했다. 나는 팝콘을 먹으면서, MBTI로 찾는 봄 피크닉 장소를 읽다가, 사람마다 먹는 방식이 성격만큼 다르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마른 오징어를 통째로 씹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쫀득쫀득한 식감과 짭짤한 맛을 최대한으로 즐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친구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너 왜 오징어 통째로 먹어? 불편하지 않아?” 친구들은 오징어를 가로로 썰어 먹거나, 초장에 찍어 먹었다. 나는 친구들의 취향을 존중했지만, 내 방식이 옳다고 생각했다. 씹는 횟수마다 짭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동시에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마른 오징어를 통째로 씹어 먹는 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나의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나는 마른 오징어를 통째로 씹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라는 댓글을 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댓글에 대한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어떤 사람들은 내 취향을 칭찬했고, 어떤 사람들은 비난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내 방식대로 마른 오징어를 씹어 먹을 것이다. 밖은 여전히 춥지만, 내 마음은 따뜻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앙상한 겨울나무들을 쳐다보았다. 비록 세상은 혼란스럽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