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얼마 전 남편의 최애영화 중 하나인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다시 한 번 감상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오전, 오후 내내 남편은 힘들어했는데,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 반복되니 잠시나마 그것을 잊기 위해 피난처로 삼은 것이 프로도와 샘이 반지를 녹이기 위해 찾은 운명의 산(Mount Doom)이다.
우리는 멍하니 영화를 보다가 알게되었다. 온갖 고난을 다 겪고 이제 겨우 고지가 눈 앞에 보이는데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프로도와 샘의 모습이 영락없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걸.
들고 있던 짐을 다 버리고도 몇 걸음 가지 못한 프로도는 자리에서 쓰러져버리고, 그런 프로도를 안고 정신을 차리게 하려 안간힘을 다하는 샘의 모습에 우리는 울음과 웃음이 동시에 나왔다.
샘은 프로도에게 자신이 반지를 갖고 가겠다고 얘기했지만, 프로도는 그건 자신만이 할 수 있다며 도움을 거절한다. 샘은 그렇다면 반지를 갖고 가지는 못하지만, 프로도를 옮기는 건 가능하다며 반쯤 정신을 잃은 프로도를 번쩍 안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떻게 저렇게 우리와 닮았을까. 몇 번이나 진한 감동을 준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또 이렇게 이번에도 어김없이 새로운 감동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남편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새벽 어스름 해가 뜰 때 까지도 잠에 들지 못해 책상에 앉아있거나, 쇼파에서 노트북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겨우 누운 침대에서도 걱정에 뒤척이는 모습을 나는 몇 해나 계속 바라보고 있다.
나의 오래된 막연한 상상 속에서 남편이 뛰어난 학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단하고 깊고 또렷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명석한 두뇌,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사과정은 나의 안일한 상상을 세게 밟아버리기라도 하듯 아주 힘들고 오래 걸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나는 프로도를 보좌하는 샘처럼 그와 함께 이 여정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걸어왔지만,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다 부수적인 것들 뿐이기에 그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도와줄 수 없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된 일이기 때문에 내가 그의 곁에서 그를 돕는다는 것은 어쩌면 굉장히 쓸모 없는 하찮은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기도 하다.
고통스러워 하는 배우자에게 어떠한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이런 나날들은 가끔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렇고, 힘들어 하는 사람을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때문에 그렇다.
그의 푸념과 원망을 들어줄 때에 나는 대부분 긍정적인 미래가 있다는 이야기로 그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방법은 10에 9번은 실패로 돌아간다. 오히려 그는 나의 대답을 듣고 전혀 위로받지 못하고 더욱 상처받는 것 같아 보인다. 나는 허둥지둥대며 다른 방법을 떠올려보지만 아무리 곁에 항상 있는 사람이라도 그 깊은 마음속의 아픔까지 모두 다 알수는 없으니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이야기만 더욱 더 나열하게 될 뿐이다.
추석을 맞아 우리는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과 통화를 했다. 여기서는 아무 날도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아주 큰 명절이기에 우리는 한국 달력과 시차를 계산해서 부모님들의 스케줄을 고려한 최적의 시간에 전화를 한다.
남편의 부모님과 통화할때, 우리의 안부가 곧 박사과정의 안부이기에, 안부를 물으시는 시부모님께 남편과 나는할 수 있는 얘기가 많이 없었다. 일단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을 다 말씀드리기도 어렵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하실 부분이 많다. 그리고 괜한 말 한마디에 크고 막연하며, 즐거운 일상을 망치게 할만한 걱정거리를 그분들께 드릴 순 없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에 말을 아낀다.
하루하루 그래도 시간은 간다. 조그마한 노력들은 어찌됐던간에 누적이 된다. 다행히 뒤로 가는 것은 없다. 꾸역꾸역 노력도 앞으로만 간다. 길고 지루한 싸움도 아주 먼 어느 날에는 끝난다. 불완전한 인간들이기에 우리가 가는 길은 완벽하지 않겠지만, 목표를 완성시키기에는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