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프로젝트로 MVP 없이 회고 습관 형성 서비스 PoC
모든 제품 개발 팀이 그렇지만, 사이드 프로젝트에서는 특히 ‘어디에 시간을 써야 할지’, '시간을 써도 될지'를 판단하는 게 더욱 중요합니다. 저처럼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에 앞서 방향성을 고민하고 있거나, 제품을 만들기 전에 먼저 실험해보고 싶은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또 10기 PMPO 빌리지 반상회에서 진행했던 발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처음에 제 삶이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과 너무 멀어져 있다는 감각이 있었습니다. 처해있던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한 방법으로 회고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꾸준히 이어가지 못했고, 그 경험은 오히려 자기 자책과 무력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게 단지 나만의 문제일까 싶어, 주변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패턴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회고를 꾸준히 작성하기 어렵다는 것은 저만의 문제가 아님을 발견했습니다. 대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패턴이 있었고 그 안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회고는 나와의 약속이기 때문에 미뤄도 된다
즉, 회고를 습관으로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회고’라는 행위가 혼자만의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 대화는 제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나와의 약속’이 아닌 ‘타인과의 약속’으로 프레이밍을 바꿀 수 있다면, 회고는 더 지켜질 수 있는 행동이 되지 않을까?라는 인식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 인식은 제품의 핵심 방향을 잡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결국 사용자들이 겪고 있는 ‘회고를 미루게 되는 구조적인 이유’를 다시 정의하게 되었고, 그 해결책을 설계해 보기 위한 실험으로 프로젝트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고를 ‘나와의 만남’이 아닌 ‘다른 대상과의 만남’으로 프레이밍 하기로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대화처럼 느껴지는 구조를 만든다면, 회고라는 행위가 단순한 기록이 아닌 관계 맺기로 전환될 수 있다고 보았고, 그 지점이 바로 이 프로젝트의 핵심 기획 의도가 되었습니다.
회고를 습관으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은 많지만, 막상 그것을 행동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기록’이라는 행위를 사용자가 자연스럽게 반복하게 만들 수 있는 구조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참고하게 된 것이 바로 니르 이얄(Nir Eyal)의 『Hooked』에 등장하는 Hook 모델이었습니다. 이전에 UX 북스터디에서 한 번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번뜩 생각이 났습니다. Hook 모델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듀오링고 같은 사용자 일상에 침투한 제품들의 행동 설계 기반 구조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행동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좋은 기능”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전제를 깔고, 사용자의 행동을 설계할 수 있는 네 가지 반복 요소를 제시합니다. 이 모델을 회고라는 습관을 설계하기 위한 도구로 해석하고, 제품 구현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이 연결해 보았습니다.
1. Trigger (자극)
- 사용자가 행동을 시작하게 되는 내·외부의 신호
- 회고를 작성하겠다고 약속한 시간에 통한 알림 메시지
2. Action (행동)
- 보상을 기대하고 취하는 최소 노력의 행위
- 짧은 회고 입력
3. Variable Reward (가변적 보상)
- 예측할 수 없는 보상이 제공되는 구조
- 사용자가 예측하기 어려운 AI 어시스턴트의 응답
4. Investment (투자)
- 행동이 반복될수록 사용자가 서비스를 떠나기 어려워지는 구조
- 회고가 쌓일수록 내가 만든 기록이 생기고, 이후 주간·월간 회고에 재활용되어 lock-in 되는 구조
이러한 Hook 기반 설계는 ‘회고는 혼자 하는 것’이라는 기존의 전제를 뒤엎고, ‘반응이 돌아오는 대화’로서의 회고라는 새로운 사용자 경험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 ‘나와의 약속’을 ‘누군가와의 만남’처럼 전환한다는 프레이밍
2. AI를 통해 회고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는 가변 보상 구조
인터뷰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종합하여 회고 습관 형성을 돕기 위한 전략을 설계해 다음과 같은 핵심 가설을 수립했습니다.
회고에 대해 AI 어시스턴트가 가변적인 피드백을 제공한다면, 사용자는 더 자주 회고를 작성하게 될 것이다.
제품을 바로 만들어도 괜찮지만, 개발을 직접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 이전에 “다 만들어놨는데 아무도 안 쓰는” 프로젝트를 경험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정말 필요 없는 걸 만들까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렇기에 멤버를 모집하고 기능 구현보다 먼저, 실효성 있는 검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 당장 만들 수 있는 가장 간단한 형태로 MVP를 구성하고, 검증했습니다.
개발 리소스 없이 실험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Chat GPT API와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활용했습니다. 복잡한 기능 없이도 “내가 회고를 작성하면, AI가 응답해 주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실험에서 가장 핵심적인 구조였습니다.
1. 회고 입력 제공
작성의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해 4L 같은 회고 프레임 워크 제시
2. GPT 응답 생성
회고를 대화처럼 느끼게 하고, 보상에 대한 감각을 제공
3. 가변적 피드백(Variable Reward)
AI가 매번 다른 어조·내용으로 답변, 예측 불가능성 확보
4. 어시스턴트 성격 선택
1차 실험 이후 “내가 정말 위로가 필요한 날엔, 좀 더 공감해 주는 말을 해주는 친구를 만나고 싶고 해결책이 필요한 날엔 실용적인 조언을 잘해주는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인사이트에 기반하여, 응답을 제공하는 어시스턴트를 사용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용자의 감정 상태와 상황에 맞는 피드백을 받을 수 있게 하려는 시도였습니다.
5. 카카오톡 푸시 알림
푸시 메시지를 앱을 통해 제공할 수 없으니 참가자들을 카카오톡방에 초대한 뒤, 정해진 시간마다 수동으로 메시지를 발송했습니다. 회고를 작성하도록 유도하는 Trigger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6. 주간/월간 회고 캘린더 뷰
회고를 요약적으로 보여주고 주간/월간 회고를 추가적으로 작성하게 해 Investment 효과를 강화하고 자신의 회고를 다시 봄으로 회고에 대한 효용을 느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전반적인 콘셉트는 어릴 적 즐겨 봤던 스펀지밥에 등장했던 ‘마법의 소라고동(Magic Conch Shell)’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주인공들이 외딴 숲에서 무언가를 결정할 때마다 소라고동 인형에게 질문을 던지고, “안 돼” “기다려 봐” 같은 예측불허의 대답을 받는 구조가 회고 경험에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AI Assistant인 소라고동에게 오늘 있던 일을 얘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회고 습관이 만들어지고 그를 통해 삶에 대한 통제감도 마법처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을 담아 <소라고동의 마법>이라는 이름으로 회고 작성 습관 형성 챌린지를 오픈해 참가자를 모았습니다. 이 유쾌한 콘셉트는 사용자들의 진입 장벽을 상당히 낮췄다고 생각이 듭니다.
OMTM(One Metric That Matters)였던 회고 작성 빈도는 평균적으로 약 50% 상승했으며, 챌린지 종료 후 측정한 동일 문항 사전·사후 설문 비교를 통해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회고 작성에 대한 태도는 15% 증가했으며, 회고 작성을 통해 평균적으로 자기 효능감이 17% 증가했고 자기 인식 정도 또한 6% 증가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정성적인 인터뷰를 통해서는 사용자들이 챌린지에서 시스템을 사용하며 감정적인 연결과 자기 객관화의 기회를 통해 회고 작성에 대한 태도가 증진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혼자 노트에 쓸 때에는 감정 쓰레기통 같이 썼는데, AI Agen에게 응답을 받고 싶어 최대한 소라고동이 알아들을 수 있게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감정을 정제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예상치 못한 인사이트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 일부 사용자에게는 회고 작성이 이제는 유희적인 행동이 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후 혹시나 해서 Intention to Pay 실험도 진행해 봤습니다. 소액의 참가비를 받고 환급 조건부로 실험을 열어보았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현금 송금을 통해 참여 의사를 밝힌 사람들이 있었고, 이를 통해 이 서비스가 무료 도구를 넘어 지불할 만한 가치를 느끼는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확인했습니다. 물론 간이 조그마한 저는 당황스러워서 얼른 유료 챌린지를 닫고, 참가비는 돌려드렸답니다
하지만 이번 실험을 통해, 큰 기능 없고 UI가 조잡한 MVP로도 사람들의 행동이 바뀌는 걸 보았습니다.
사용자들이 이 구조 안에서 감정적으로 지지받고,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이 MVP는, 제품이 될 자격이 있고 진짜 만들어도 괜찮겠다.”라는 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확신을 바탕으로, 저는 주변에 함께할 수 있는 사이드 프로젝트 동료를 모집했고, 챌린지 실험을 통해 서비스에 공감했던 개발자, 디자이너 분들과 함께 본격적인 제품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MVP 검증 사이드 프로젝트는 2달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를 통해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사람’을 넘어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문제를 정의하고, 실험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행동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도 제품화 과정을 통해 팀원들과 협업하며 많은 것들을 배우고 체화하고 있습니다)
1. 지속 가능한 동기부여
내가 진짜 공감하고 해결하고 싶은 문제여야, 지치지 않고 계속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지속적으로 사용자를 만나서 문제 해결을 위한 동기 부여를 계속해서 얻었는데, 꼭 UX리서처나 디자이너가 아닌 다른 직군의 구성원이더라도 직접 이런 VoC를 듣는 게 상당히 도움 되는 것 같습니다.
2. 진짜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선 “왜?”를 반복해서 물어야 한다.
계속 왜?를 묻다 보니 회고를 하지 않는 진짜 이유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적당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MVP를 만들고 나서도 제가 예상하지 못한 제품의 장점을 알게 되어서 정성적인 리서치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3. 무엇을 검증할 것인지 정확히 정의한다면, 개발 없이도 검증할 수 있다.
기능 구현이 아닌, 사용자 행동의 변화를 중심으로 MVP를 설계했습니다. 그 덕분에 제한된 리소스로 문제 해결책을 검증해 낼 수 있었습니다.
4. 완벽하지 않아도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완벽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실행을 미루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그걸 지금 어떻게 작게 시도할 수 있는가?”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작지만 명확한 사용자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간단한 구글 시트만으로도 누군가의 습관을 만들어 주고 건강한 멘털에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5. 사용자의 행동 변화는 설득을 위한 가장 강력한 근거
MVP 사용자들의 직접적인 변화가 있었기에, 검증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명확한 실제 팀을 설득해서 꾸리고 협업하여 프로덕트 개발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품화된 앱을 사용하신 분은 아직 많지 않지만 3분 정도 소라고동의 응답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사실 그 모습을 보고 제가 더 울컥했습니다. 작지만 누군가를 치유해 주는 사례들을 통해 비로소 제품이 존재할 자격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또 사이드 프로젝트로 가볍게 시작했지만 디지털 프로덕트로 누군가에게는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도 깨닫고, 책임감을 가지고 제품 개발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디지털 치료제 도메인에 들어오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이 제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지언정 정말 깊고 진하게 제품을 통해 돕는 것의 희열을 알아버렸습니다.
최근 회사에서 (나의 빛) 팀장님과 원온원을 진행했습니다. 왜 기획자로 일하냐는 질문을 주신 덕에 대학생 때로 돌아가, 그리고 학창 시절로 돌아가 디지털 프로덕트를 만들고 싶었던 본질적인 이유를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항상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만한 판을 깔고, 함께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학생회에서 수많은 정책고과 행사를 기획하고, 밴드와 축구 같은 팀 활동을 오래 해오면서 누군가와 함께 몰입하고, 연결되고,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에 자연스럽게 끌려왔습니다. 대학에서는 informatics와 디자인을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디지털 플랫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적은 리소스로도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판을 깔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 디지털 프로덕트라는 매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반복되는 하루 속에 스며들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만큼 매력적인 ‘판’은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목표가 실현되었다는 감각을 이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회고를 쓰며 울고 위로받고 해소되었다는 피드백을 들었을 때, “디지털 프로덕트를 만들고 싶었던 이유”가 실현된 기분이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기능보다 경험, 정답보다 질문, 스펙보다 가설을 먼저 고민하며, 기술을 통해 누군가가 변화의 흐름에 올라탈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