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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의 재미 Oct 09. 2017

칼의 노래

가을이 한밤 중의 도둑처럼 다가왔다 머무른다.

지독히도 무덥던 여름이 하루 밤 사이 자취를 감췄나보다.

새벽녘, 차가운 바람이 반갑기도 하고, 잠을 달아낸 바람이 얄밉기 하다.

잠이 덜 깬 희뿌연 의식 속에서 머리 맡에 팽겨쳐 둔 칼의 노래를 읽어 내려간다. 


"그 해 겨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격군과 사부들이 병들어 죽고 굶어 죽었다.

나는 굶어 죽지 않았다. 나는 수군통제사였다. 나는 먹었다. 부하들이 굶어나가는 수영에서 끼니때마다 먹었다.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수십 구씩 묻던 날 저녁에도 나는 먹었다.

나는 흔히 숙사 방안에서 안위, 송여종, 김수철 들과 겸상으로 밥을 먹었다.

부엌을 맡은 종이 보리밥에 짠지, 된장국을 내왔다. 우리는 거의 말없이 먹었다.

포구에 묶인 선실 안에 주린 수졸들은 포개져 쓰러져 있었다. 

보리밥의 낟알들이 입안에서 흩어졌다. 나는 흩어진 낱알들을 한알씩 어금니로 깨트렸다.

짠지를 씹던 송여종이 말했다. '겨울이 빨리 가야할 터인데요.'

그 만 밥을 넘기기가 민망한 자의 무의미한 소리처럼 들렸다.

'겨울이 빠르거나 더딜리가 있겠느냐?' 나는 송여종처럼 무의미한 소리로 대답해주었다.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말했다. '보리알이 덜 물렀다. 잘 씹어 먹어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해 겨울의 밥은 무참했다. 끼니는 계속 돌아왔고 나는 먹었다. 나는 말없이 먹었다.

경상, 해안 쪽에, 백성의 군량을 빼앗은 적의 군량은 쌓여 있었다. "

 

한 없이 작은 인간의 나약함을, 그리고 두려움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읽어내려간다.


물들일 염(染), 책의 서두에 '이글은 소설로서 읽혀지길 바란다고' 작가는 말하지만,

인간 이순신의 내면이 그대로 적셔져 그대로 물들어 간다. 왜곡 아닌 왜곡이 그냥 좋다. 


몰입감에 한번에 읽어내려가다가, 

문장력에 다시 한번 위에서 아래로 읽어내려가다가,

책을 덮을 무렵엔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잠이 안오네.. 를 입 밖으로  내 쉬는 나를 보면서.


      그래도, 두려움에 떨었던 인간 이순신, 우리시대가 당신에게 큰 빚을 졌다고 느끼면서.

문장력에 감탄하면서, 오랜 만에 독서의 즐거움을 안겨준 작가 김훈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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