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자전거로 관통하던, 그 아홉째 날.
간만에 늦게까지 잘 잤네요.
폭신폭신한 이불 위에서 이리저리 구르다가,
아침 도시락을 까먹고 슬슬 짐을 꾸립니다.
매일 해 뜨는 5시면 눈을 떴는데, 피로가 풀리는 느낌입니다.
달릴 준비되었습니까, Mr. 알톤!
물도 충전하고, 다이소에서 산 라이딩용 장갑도 하나 구해서 껴봅니다.
사실 드라이버용이에요.
오늘 날씨도 흐리긴 하지만, 라이딩 하기에는 딱 좋습니다.
히메지까지 38Km나 남았지만, 그건 250번을 따라갔을 때의 이야기고
아이오이에서 2번 국도랑 다시 합류할 예정입니다.
역시 지도가 있으니 최단거리로 갈 수 있군요.
비 온 뒤에 공기는, 매우 차갑고도 상쾌해서 마치 샤워를 하는 듯합니다.
삼림욕이 따로 없습니다.
이젠 업힐도 자유자재, 아코시를 뒤로하고 고개를 넘습니다.
아이오이 시내에 서서, 표지판을 확인해둡니다.
저기로 가면 2번 국도로구나~
도중에 만난 정치인 야마구치 츠요시 상의 멋진 선거 포스터입니다.
안 뽑으면 한대 칠 것 같군요.
꽤나 인상에 남는 포스터입니다.
후후 모든 것은 다 계산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히메지 성뿐!
어라? 이상하다? 분명히 도로를 따라왔는데, 갑자기 막혀버렸습니다.
자전거를 끌고 계단을 올라갈 수도 없는 상황.
지난 시절 즐겨보았던 여행기들의 한 장면이 데자뷔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설마...
오른쪽으로 우회해봐도
왼쪽으로 우회해봐도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 분명 2번 국도는 저기에 있는데. 조그만 산 하나가 길을 막다니!
산 중턱 즈음에서 물어봅니다.
히메지는 어디로 가면 됩니까?
음, 이 쪽으로 가면 됩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그 말을 믿고 깊은 수해 속으로...
열심히 끌바로 업힐을 시도해보지만
비 온 뒤에 땅은 질퍽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일본 자전거 여행기의 명장면, 이곳에 이르러서야.
저는 절감했습니다.
아, 길을 잃었구나.
지도를 보니 멀리 우회로가 있어서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쁘고 해서 그저 죄 없는 산만 노려다 봅니다.
일본 정부가 원망스럽습니다.
하지만 힘없는 외국인이라 그저 페달을 밟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로 가도 히메지만 가면 되겠죠, 뭐.
너무 배가 고파 수제 도시락집에 들러봅니다.
우리로 치면 한식 뷔페 같은 곳.
값은 있지만 꽤나 맛있는 식사시간이었습니다.
허나 글을 새로 업로드하는 10여 년 뒤의 이 시점에서 보기엔 비싸지 않네요. 역시 디플레이션의 나라, 일본.
여정은 계속되어 끝내 히메지에 도착했습니다.
벌써 성벽의 흔적이 보이네요.
히메지 성... 하얀 백로성이라고도 불리우는...일본 성의 공주.
잠시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이 순간 정말, 내가 일본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물 크기가 상당히 큽니다.
얼마 전에 봤던 오카야마랑은 비교가 안되는군요.
수 백 년이 지나도 물결은 언제나 잔잔하군요.
본격적으로 히메지 성을 구경하도록 합시다.
찍는 방향에 따라 그 멋이 달라 보인다던 히메지 성,
어떻게 찍어도 작품이 나오는군요.
입장료는 제법 후덜덜한 가격이었지만 그 정도 돈에 굴할 순 없습니다.
표정으론 이미 세계를 정복했어요.
여차하다간 길 잃고 시간 낭비할 가능성이 농후한 성이다 보니,
이렇게 친절하게 관광루트를 설명해주었으니 참고하시면 됩니다.
다양한 모양의 총안
옛 히메지 성의 모습입니다.
정말 웅장했었네요.
멋진 성과
절경을 망치는 1인.
일단 추천 루트를 따라, 니시노마루로 향합니다.
화사하고 밝은 외양과는 달리 내부는 좁고 어두컴컴합니다.
그래도 전망은 좋네요. 방어의 목적이었을지.
비좁은 계단을 오르고 나니
'나가쓰보네'라 불리는 긴 복도가 펼쳐집니다.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집들, 히메지는 화려한 성과는 다르게 도시 자체는 작습니다.
그래도 '센히메'의 전설이 녹아있는 이곳,
지금 이대로의 모습도 충분히 괜찮다는 생각이 드네요.
본격적으로 혼마루로 향합니다.
일본인 전용 문을 지나고 나면
헷갈리게도 갑작스레 내리막길이 펼쳐집니다.
성을 타고 올라서 천수각을 정복하라는 명령에 혼동을 주는 구조입니다.
멀어지는 듯한 길을 내려가고 나면 다시 오르막이 나옵니다.
방어적으로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인증샷 한컷!
저 때로 돌아가고프네요.
건축에 문외한인 저로서도 흠뻑 취할 것만 같은 선의 미학.
보기보다 시원하진 않지만,
그래도 살짝 몸을 식히고 나서, 다시 열심히 올라가 봅니다.
옛날 구조 그대로라 엘리베이터 같은 건 없어요.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야 천수각 맨 위층에 도착합니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시내,
마치 다이묘가 된 듯, 기분이 마구 들뜹니다.
바람이 창문 사이로 불어 들어오면서 제 땀을 식혀줍니다.
성 안엔 이렇게 미니 신사도 있고,
당대의 총과 그림 등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있으니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할 겁니다.
옛 히메지를 오밀조밀하게 모사한 모형도 있네요.
마침 신혼여행을 오신 한국 부부를 만나서
사진을 부탁드려봅니다.
이 추억 영원하기를.
나름 잘 찍었다고 생각하는 사진들입니다.
히메지 성, 이젠 안녕.
성 구경에 흠뻑 취해있느라 시간 가는지 몰라,
오사카는 오늘 죽어도 못 갈 것 같습니다.
뭐,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되겠죠.
그렇게 막 달려서 히메지 성을 빠져나갈라는 찰나,
뻥! 소리가 나서 뒷바퀴를 보니, 이게 웬걸!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만 것입니다.
허겁지겁 판을 벌리고 수리를 시작합니다.
히메지 구경할 때의 좋은 날씨는 어디로 갔나요.
비 오기 전에 후다닥 수리해야 되는데, 처음이다 보니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빗방울이 조금 떨어지기 시작할 때 겨우 수리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다시 허겁지겁 우의를 입습니다.
여행이란 역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에 두근두근한 것이겠죠.
오늘 같은 날씨에는 저녁이라도 제대로 먹어야죠.
타카사고 밥집엘 들어갑니다.
조촐하지만 참 맛있었습니다.
더구나 식후에 따끈한 차까지 제공이 되니,
이 세상 근심이 모두 사라집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벌써 어두컴컴합니다.
고작 8시밖에 안됐는데, 너무하는군요.
오늘도 심야를 달리려고 하는데
이런, 무릎이 갑자기 통증을 호소합니다.
히메지 성 등반이 그리 힘들었는지...
한쪽 다리에만 힘줘서 달리는 것도 슬슬 힘에 부칩니다.
저 멀리 높은 건물에서 보이는 세 글자, 아카시.
오늘은 여기서 일정을 마쳐야 할 것 같네요.
호수 위의 신비로워 보이는 마을을 지나갑니다.
그리고 아카시 역에서 지도를 보고, 근처 공원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선객도 있고, 벤치도 없어 다시 이리저리 헤매다가
주택가의 조그마한 공원에 이르러 자기로 합니다.
힘들지만, 그래도 히메지 성의 아름다운 절경을 생각하며 잠이 듭니다.
Distance - 88.34km
Average Speed - 15.1km/h
Riding Time - 5:49:51
Max Speed - 46.2km/h
니시아카시역 근처, 신사가 옆에 있는 공원
노숙지수 : 3
장점 : 식수대가 있고 벤치가 여러 개다. 그리고 선객이 없다.
단점 : 주택가 가운데라 통행이 조금 있다. 신칸센 소리도 들리고, 모기도 있고.
샤워도 불가능하다.
결론 : 웬만하면 다른 데서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