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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성 Nov 07. 2023

백마리 개, 겨울 도입부

13. 오늘부터는 겨울이다.

해가 뜨기 전 집을 나선다. 계단을 내려오면 직장이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개들이 나를 반긴다. 밤새 온기를 나눠주느라 지친 몸이 둔해 보인다. 손을 내밀어 한 마리씩 쓰다듬는다. 신선한 온기를 맛보려는 개들이 몰려와 핥는다. 침이 묻은 손에 찬바람이 스치니 아프다. 겨울이 시작되었다.  




겨울이라 미안하다.


날이 밝아온다. 해는 아직 언덕을 넘어오는 중이다. 금방이라도 떠오를 것 같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굼뜨다. 담장을 대신하는 개들의 비닐하우스가 높다. 덕분에 그늘이 쉽게 거치지 않는다. 각자 높은 곳을 찾아 올라간다. 조금 더 영리한 개들은 해가 보일만큼 뒤로 물러나 앉는다. 밤새 기다렸던 순간이 다다르고 있다.



괜찮아. 곧 해가 뜰 거야.



겨울이 내 탓이 아님에도 미안한 마음에 이리 말을 건넨다. 따뜻한 난로를 피워주지 못해 미안하다. 홀로 따뜻한 밤이어서 미안하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이라서 미안하다.


햇살이 비추는 자리에 개들이 모여든다. 장난기 많은 어린 개들도 자리 잡기 바쁘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짖어대던 개 두 마리도 이때만큼은 휴전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산경 쓰던 일은 나중으로 미루어진다.




시작의 증거


배설물을 치우러 돌아다니지만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하루를 밤과 낮으로 나누어 활동을 멈추는 쪽은 사람이다. 개들은 시간 따위 무시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잔다. 밤에도 왕성하게 먹고 활동한다. 그런데 배설물이 눈에 띄게 적다. 유추되는 가능성은 하나다. 밤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사료도 줄지 않았다. 지난주만 하더라도 빈 그릇을 채우느라 바빴다. 20~30kg 몸무게의 개가 나만큼이나 많이 먹는 것 같았다. 어제 그리고 오늘, 한 번도 사료를 채우지 않았다. 먹고 자는 일이 전부였던 개들이다. 다른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밤을 버텨내는 일. 그랬을 것이다.


작년 겨울을 앞두고 비닐하우스를 2채 지었다. 비닐하우스마다 출입하는 개들이 달랐다. 무리에 속해 허락을 받은 개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출입 조건은 까다로워졌다. 비가 와도 비닐하우스로 들어가지 못해 밤새 비를 맞는 개가 있을 정도였다. 날씨가 추워지니 한시적으로 조건이 완화된 듯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개들이 보였다.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환절기의 마지막 날


겨울이면 아침 점심을 거른다. 시간 맞춰 밥을 먹지는 않기에 꼭 아침이고 꼭 점심은 아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식사 시간을 갖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겨울의 낮은 터무니없이 짧다. 해가 떠 있는 동안 해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식사 시간으로 30분 혹은 1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까딱하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한겨울은 오히려 낫다. 추위에 익숙해지면 보다 수월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눈이 내리면 장난 삼아 이글루를 만들기도 한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개들에게 짓밟힌다. 그러라고 만들기에 마음의 상처는 받지 않는다. 이외에도 한겨울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런 겨울을 위한 적응 기간을 갖는다. 환절기라 부르는 시간이다. 적응을 위한 특별한 일은 없다. 이불을 겹겹이 깔아주고, 가격이 폭등한 기름을 부어 난로를 틀어준다. 걱정되는 마음에 새벽 2시, 4시에 알람 없이 일어나 살펴보고, 긴 밤을 버텨내는 일이 지겹지 않도록 어수선하게 돌아다닌다.


환절기는 어제까지, 오늘부터는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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