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햇볕으로 기어가다.
백 마리를 한 마리씩 살피지는 않는다. 그냥 눈대중으로 둘러보는 수준이다. 10년을 그래서 그랬을까? 알 수 없는 찝찝함에 되돌아보는 경우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왠지 모르게 저 자리에 있어야 할 개가 보이지 않았다. 직소 퍼즐의 조각 하나가 빠진 것처럼 불편했다. 되돌아 주변을 살폈고, 평상 아래 수그리고 있는 녀석을 발견했다. 앉은 것도 엎드린 것도 아니었다.
간식을 주니 밖으로 나왔다. 기어 나왔다. 어린아이가 아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것처럼, 녀석은 뒷다리를 끌고 나왔다. 흙바닥에 긁혀 지저분해진 뒷다리였다. 녀석의 얼굴을 보아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연유로 여기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존재감이 희미했던 녀석이었다.
늘 말한다. 아프거나 병들면 그때 어루만져 주겠다고 말이다. 사람을 좋아하던 개도 여기에 오면 금방 뒤돌아 선다. 정확히는 사람의 도움을 예전만큼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먹는 것부터 욕구 해소까지 사람이 해결해 주기만을 기다리던 개에서 한 마리의 야생 동물이 되어버린 셈이다. 물론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사람과 동등해졌을 뿐이다.
아마 이 녀석도 그랬을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거나 혹은 죽도록 미워하는 개들은 존재감을 숨길 수 없다. 걷다가 치이고 돌아서도 짖음을 멈추지 않는다. 녀석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야생 동물처럼 스스로 자립한 상태였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했다. 아프거나 병들면 그때부터, 그러니 지금 어루만져 주겠다고 말이다.
뒷다리가 축 쳐진 채로 녀석을 들고 나왔다. 그나마 작은 개들이 있는 실내 공간으로 옮겼다. 다행이었다. 한 달 전에 실내 바닥을 부드러운 표면으로 도장했다. 이럴 줄 몰랐지만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혹한에 쓸 이불을 꺼내어 바닥에 넓게 깔았다. 어차피 질질 끌고 다닐 뒷다리라면 바닥보다 이불 위가 편할 것이다. 실내의 절반을 이불로 채웠다.
아픈 것이 아니다. 문제도 아니다. 그저 하반신 마비이다.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가정에서 키우는 개였다면 당장 큰 병원으로 옮겨 검사하기 바빴을 것이다. 녀석이 유기견이어서 그 과정을 생략하는 것은 아니다. 해결은 나중의 일이다. 당장 하반신 마비인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에 집중할 뿐이다.
'귀순이'란 개가 있었다. 백구였다. 녀석과 마찬가지로 어느 날 갑자기 주저앉았다. 그리고 4개월 후에 다시 걸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걱정되는 이가 받아온 약도 먹이지 않았다. 다시 걷게 만드는 일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해할 수도 있다. 여기는 오늘만 산다. 오늘을 잘 살기 위한 일로 하루를 채우는 곳이다.
약을 먹이고 있다. 걱정되는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마음 같아서는 동물병원에 처넣어 책임을 던져버리고 싶다. 그러나 불가능이다. 병원비 때문에 입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책임을 미루고 또 던져버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다리가 부러진 개가 동물병원에 간다. 다리가 다시 붙어서 나올 리 없다. 여기서 몇 달 동안 매일 붕대를 풀고 감아주기를 반복해야 한다. 럭키라는 백구는 거의 1년을 그랬다. 상처가 나으면 병원 덕분이고, 그러하지 않으면 내 탓이 되었다. 그렇다면 걷지 못하는 개가 좁은 입원장에 갇히는 것은 누구를 탓해야 하는 것일까?
여전히 질질 끌고 다닌다. 이제 1개월쯤 되었다. 물을 마시기 위해 사료를 먹기 위해 질질 끌고 다닌다. 다른 개에게 다가가기 위해, 때로는 멀어지기 위해서 질질 끌고 다닌다. 아침이면 햇볕이 드는 창가로 기어가고, 저녁이면 난로 옆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앞다리만으로 격전을 치른다. 움직여야 할 상황이, 그리고 걸어야 할 이유가 지금 녀석에게 필요하다고 굳게 믿는다.
녀석은 걷게 될 것이다. 지금껏 4마리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