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 엘라(4)
사랑의 규칙 40가지 - 번역 (16)
노쓰햄튼, 2008년 5월 21일
다음 날 아침 일찍 데이빗은 엘라와 언쟁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서 집에 돌아왔지만 엘라는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무릎 위엔 <달콤한 신성모독>이 펼쳐져 있고 옆에는 빈 와인 잔이 놓여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다가가 좀 더 편히 잘 수 있도록 이불을 끌어올려서 덮어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십 분 정도 지나 엘라는 잠에서 깼다. 데이빗이 샤워하는 소리를 듣고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밤을 같이 보냈을 테지만 아침 샤워만큼은 자기 욕실 말고 다른 데서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데이빗이 샤워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엘라는 자고 있는 척했다. 그래야 그가 어젯밤 일을 설명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한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남편과 아이들은 모두 나갔고, 엘라는 다시 혼자가 되어 부엌에 있었다. 삶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가장 좋아하는 요리책인 ‘단순하고 쉬운 요리의 예술’을 펼쳤다. 몇 가지 선택지를 고려해본 끝에 그녀는 오후 내내 자신을 충분히 바쁘게 만들어 줄 메뉴를 다음과 같이 구성했다 :
사프론, 코코넛, 오렌지를 넣은 클램차우더
버섯, 신선한 허브, 다섯 가지 치즈를 넣은 오븐 파스타
로즈마리 양념을 한 송아지 갈비와 식초에 재워 구운 마늘 요리
라임에 재운 껍질콩과 콜리플라워 샐러드
그리고 디저트로는 따뜻한 초콜릿 수플레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엘라가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평범한 재료들로 맛있는 요리를 탄생시키는 것은 성취감과 만족감을 줄 뿐 아니라, 이상하게 관능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요리를 할 때는 마음이 평온해졌다. 부엌은 바깥세상의 온갖 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고, 그녀 내면의 시간이 멈춰버리는 곳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겐 섹스가 같은 효과를 줄 수도 있을 거라고 그녀는 상상했지만, 섹스는 반드시 두 사람이 있어야만 하는 반면, 요리에 필요한 건 단지 시간과 관심, 그리고 장바구니에 든 식재료였다.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요리를 하는 사람들은 요리는 영감이며 독창성이고 창의력인 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실험적’이라는 단어를 가장 좋아한다. 엘라의 생각은 달랐다. ‘실험’은 과학자나 예술하는 별종들에게 양보해야 하지 않을까? 음식을 하려면 기본을 배우고 가르침을 따르고 경험에서 나온 지혜를 존경해야 한다. 우리의 의무는 유서 깊은 전통들을 활용하는 것이지 그것들로 실험을 하는 게 아니다. 요리의 기술은 관습과 문화의 결과물이다. 요즘 젊은 세대가 그런 것들을 경시하고 있는 건 맞지만, 부엌에서 전통을 따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엘라는 반복되는 일상도 소중하게 여겼다.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대에 가족들과 아침을 먹었고, 주말마다 같은 쇼핑몰을 갔으며, 매달 첫째 일요일엔 이웃들과 함께 디너 파티를 열었다. 데이빗은 일중독이어서 남는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엘라가 모든 집안일을 챙겼다. 돈 관리에서부터 집수리, 가구를 고치거나 덮개를 새로 씌우는 일, 관공서 등 여기저기 찾아다녀야 하는 일처리, 그리고 자녀들의 스케줄 관리와 숙제를 도와주는 일 등등 전부 다였다. 목요일이면 퓨전 쿠킹 클럽에 가서 여러 다른 나라의 음식 문화에 푹 빠져 있는 회원들을 만나고 오래된 레시피에 새로운 향신료나 재료들을 넣어 색다르게 만들어보기도 했다. 매주 금요일에는 생산자 직거래 장터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농부들과 작물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고, 설탕을 적게 넣은 유기농 복숭아 잼을 살펴보기도 하고, 장터에서 만난 사람에게 꼬마 포타벨라 버섯은 어떻게 요리하는 게 가장 맛있는지 설명해주기도 했다. 거기서 구할 수 없는 건 집에 오는 길에 대형식품매장에 들러 사곤 했다.
그리고 토요일 저녁마다 데이빗은 엘라를 데리고 외식하러 나갔는데 보통 태국 음식이나 일식을 먹었다. 그런 다음 너무 피곤하거나 많이 취했거나 아니면 단순히 그럴 기분이 나지 않을 때만 빼놓고는 섹스를 했다. 가벼운 키스와 부드러운 몸놀림은 연민이라기보다는 시들어버린 열정의 증거였다. 한때 두 사람을 가장 확실하게 결속시켰던 섹스는 꽤 오래 전에 그 매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부부 관계 없이 몇 주씩 그냥 보내는 적도 종종 있었다. 엘라는 그녀의 인생에서 한때 그토록 중요했던 섹스가 이제 사라지고 나니 오히려 해방감이 들고 자유롭기까지 하다는 게 신기했다. 대체로 그녀는 결혼생활을 오래한 부부가 더욱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 관계를 위해서 육체적인 비중을 점차 줄여가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단지 문제는 데이빗이 아내와 섹스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해서 섹스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엘라는 단 한 번도 남편의 외도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고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눈치조차 준 적이 없었다. 사실 이들 부부의 가까운 친구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엘라는 더욱 쉽게 모른 척 할 수가 있었다. 스캔들도 없었고, 당황스러운 마주침도 없었으며, 소문날 일도 없었다. 엘라는 남편이 다른 여자들, 특히 그의 여비서와 관계하는 횟수를 고려해볼 때, 그가 어떻게 그렇게 잘 숨기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별 탈 없이 능수능란하게 잘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불륜은 냄새를 풍겼다. 그것만으로도 엘라는 알 수 있었다.
만일 사건에 순서가 있다면, 어떤 게 먼저였고 어떤 게 나중에 따라온 결과였는지 엘라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섹스에 흥미를 잃게 된 것이 원인이 되어 남편이 바람을 피우게 된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로, 남편이 먼저 바람을 피웠고 그래서 그녀의 몸이 무시당했기 때문에 섹스에 대한 욕망을 잃게 된 것일까?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두 사람 사이의 광채, 결혼이라는 망망대해에서 그들의 욕망이 가라앉지 않도록 길잡이가 되어주던 그 빛, 세 아이를 낳고도 20년이나 지속되었던 그 빛은 이제는 아주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세 시간동안 엘라는 마음속에 생각이 가득한 채로 쉴새 없이 손을 움직였다. 토마토를 썰고, 마늘을 다지고, 양파를 볶고, 소스를 졸이고, 오렌지 껍질을 강판에 갈고, 통밀빵을 만들기 위해 반죽을 주물렀다. 빵 만들기는 시어머니가 약혼할 때 들려준 황금 같은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남자한테 갓 구운 빵 냄새처럼 집을 그립게 만드는 건 없단다.”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빵은 절대 사지 마라. 직접 구워라, 아가야. 그 효력이 대단할 거야.”
오후 내내 일하면서 엘라는 어울리는 냅킨과 향초, 그리고 노랑과 주황이 어우러져 조화처럼 보일 정도로 화사하고 강렬한 부케로 정교하고 우아하게 식탁을 꾸몄다. 마지막으로 반짝이는 냅킨링까지 더해 완성하고 나니, 저녁 식탁은 마치 세련된 잡지의 화보 촬영 현장 같았다.
피곤하지만 만족스러워진 엘라는 지역뉴스를 보려고 부엌에 있는 TV를 켰다. 젊은 심리치료사가 자기 아파트에서 칼에 찔렸고, 누전 때문에 병원에 불이 났으며, 네 명의 고등학생이 공공기물파손죄로 잡혀갔다. 엘라는 뉴스를 보며 이 세상에 도사리고 있는 끝없는 위험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국의 한적한 교외도 더이상 안전하지 않은 시대에 어떻게 아지즈 Z. 자하라 같은 사람들에겐 지구상의 아직 덜 개발된 지역을 여행할 용기와 열정이 생기는 걸까? 엘라 같은 사람이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일을 예측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인데, 바로 그 사실이 아지즈 같은 사람에겐 정반대로 작용하여 험난한 길을 떠나 모험을 감행하도록 영감을 준다는 게 그녀에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저녁 7시 반에 가족들은 그림 같은 식탁에 모두 둘러앉았다. 타오르는 촛불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모르는 사람 눈에 이들은 공기 중으로 고요히 사라지는 한 줄기 연기와 같이 우아하기 짝이 없는 완벽한 가족으로 보였을 것이다. 자넷의 빈자리조차 이 한 폭의 그림의 흠이 되지는 못했다. 저녁을 먹으며 올리와 에비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떠들어댔다. 쌍둥이들이 그렇게 말이 많고 시끄럽게 구는 걸 엘라가 고맙게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와 남편 사이의 무거운 침묵을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엘라는 곁눈질로 데이빗이 포크로 컬리플라워를 찍어서 입에 넣고 천천히 씹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길이 남편의 얇고 창백한 입술과 뽀얗고 하얀 치아에 머물렀다. 그녀가 수없이 키스했던, 잘 알고 있는 남편의 입이었다. 그가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엘라는 상상해보았다. 어쩐지 엘라의 마음속에 떠오른 불륜 상대는 남편의 여비서가 아니라 영화배우처럼 풍만한 가슴을 지닌 여자였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에 자신감 넘치는 여자는 가슴이 강조된 딱 붙는 드레스를 입고 무릎까지 오는 굽 높은 빨간 가죽 부츠를 신었으며 얼굴은 너무나 진한 화장으로 무지개 빛이 난다. 엘라는 데이빗이 지금 식탁에서 컬리플라워를 씹고 있는 모습과는 완전 딴판으로, 굶주린 듯 허겁지겁 달려들어 그 여자에게 키스하는 광경을 상상해보았다.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였다. ‘단순하고 쉬운 요리의 예술’로 차려진 식탁에서 남편이 바람피운 상대 여자를 상상하고 있을 때, 그때 엘라의 내면에서 무엇인가 번쩍 눈을 떴다. 그것은 그녀가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버리게 될 거라는 깨달음이었다. 아무 경험도 없는 겁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이 부엌과 반려견과 이웃들, 그리고 딸들과 아들, 남편, 요리책이며 집에서 굽는 빵 레시피 등 모든 것을 전부 버리고, 쉴 새 없이 위험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세상 속으로 그저 걸어가게 될 것을 불현듯 알게 되었다. 소름 끼치도록 명료하고 고요한 각성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