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출산이야기 [2편]

by 이현

정말이지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다. 쓰고자 하는 글을 구상하기까지 깊은 사색의 시간을 필요로 하며, 또 그 생각들을 정리하는데 에너지를 쓰고, 몇 자 적고자 자리에 앉기까지 얼마나 많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지. 세상 모든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내가 적어보고자 하는 ‘그때 그 시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감는다. 작년 오늘의 병원을 떠올려본다. 이런.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 망각력이 좋다는 것. 망각은 깨끗한 새 도화지를 꺼내주는 것처럼 멋진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썩 마음에 드는 작품을 의도치 않게 쓱쓱 지워버리는 안타까운 것이다. 지난 일 년을 떠올려본다. 역시나 아득하다. 매일매일 '나는 오늘'로 시작하는 일기라도 적어야겠다 싶다.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니들, 제발 일기 쓸 때 '나는', '오늘'로 시작하지 좀 말아라." 하시던 그 단어들.


병원에 입원해 있던 5일간은 먹고 잤던 기억이 대부분이다.(그 사이에는 아픈 배를 부여잡고 한 발짝씩 걸음마하듯 걸었던 기억도 끼어있다.) 출산 후 산모에게 미역국이 도대체 얼마나 몸에 좋은 건진 잘 모르겠지만, 병원에서부터 조리원까지 줄곧 미역국이었다. 심지어 집에 돌아와서도 산후도우미 선생님께서 미역국을 추가로 더 제공해 주셨다. 하하. 물론 나는 미역국을 좋아한다. 그리고 잘 먹는다. 원체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타입이라 삼시세끼 밥 챙겨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침대에 눕거나 기대앉아 티비를 보고 있으면, 조리실 직원분이 식판을 들고 와 병실 침대 식탁에 친히 올려주신다. 밥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내 코앞까지 배달이라니!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지.

그렇게 미역국을 먹고 또 먹던 어느 날. 특별식으로 삼계탕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옳타구나. 드디어 색다른 음식을 포식하겠구나.' 싶었다. 다음 날 점심인가 저녁인가. 침대 식탁에 커다란 그릇이 놓인 식판이 왔다. 그릇 안에는 작은 닭 한 마리가 다리를 곱게 꼬고 뽀얀 국물 안에서 누워있었다. 나는 삼계탕을 매우 좋아했다. 복날에 맞춰 삼계탕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스타일이었고, 펄펄 끓는 뚝배기 안에서 걸쭉하고 진득한 국물과 함께라면 금상첨화였다. 미역국의 연속이던 병원밥의 굴레에서 슬쩍 삐져나온 삼계탕이란! 입맛을 다시며 수저를 덥석 집어 들었지만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했다.

등심, 안심, 우둔살 같은 부위로는 소의 전체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닭의 다리, 날개, 가슴살 등으로도 닭의 전체 모습을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괜찮다. 목만 뎅강 날아간 닭의 나체는 나에게 어떤 커다란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의도치 않게 가느다란 아가의 다리가 떠올랐을 때, 소름 끼치는 느낌에 세차게 고개를 몇 번 저어 생각을 멀리 치워버렸더랬다. 옆에 있던 남편에게 삼계탕을 양보했다. 남편은 몸도 허한데 억지로라도 몇 입 먹어보라 권했지만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기세였다. 거듭 권함과 몇 번의 거절을 핑퐁하고 나서야 삼계탕 그릇은 남편의 앞에 놓였고, 나는 병실에 굴러다니던 빵을 한입 베어 물고 지금 상황의 충격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내가 만든 하나의 생명. 그리고 인간 외의 생명들. 인간을 위한 살육. 생명의 꺼져감과 그 의미. 철학적인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걷는 것이 제법 괜찮아졌을 즈음부터 밤마다 남편의 손을 잡고 편의점을 털러(?) 갔다. 남편은 장바구니를 들고 나는 먹고 싶은 것들을 죄다 쓸어 넣었다. 임신 중에는 나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식욕이 왕성했다. 하루 세끼와 더불어 야식에 후식까지 챙겨 먹고도 뒤돌면 입이 아쉬웠다. 그랬던 입맛이 출산을 하자마자 감쪽같이 사라졌다. 무엇을 입에 넣어도 까끌했다. 밥은 반공기를 겨우 먹었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나오는 식사가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편의점 안 수많은 먹거리들 중 몇은 내 까끌한 입을 달래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푸딩이고 요플레고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과자 등을 잔뜩 쓸어 담는 동안 남편은 옆에서 더 부추겼다. 이것도 저것도 저~기 저것도 사자며. 병실 안 작은 냉장고는 금방 꽉 차버렸는데, 퇴원할 때까지도 냉장고가 제대로 비워지지 않고 매일 새롭게 채워지기만 했다.


아가를 배에 품고 있는 열 달은 정말이지 하나도 외롭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학생활도 기숙사에서 보냈고, 그 후엔 고향과 먼 곳에 직장을 잡았다. 세월이 흘러 가족과 함께 살았던 시간보다 혼자 살아온 시간이 더 길어졌다. 그런 나에게 외로움은 고질병이라 할 수 있겠다. 다행인 것은 사회 보편적 고질병이라 열등감까지 느낄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나에게 항상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것은(설사 그게 내가 오랫동안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존재일지라도), 몸을 웅크려 나 스스로를 안아주면 그 안의 진귀한 존재가 함께 안긴다는 것은 커다란 충만감을 주었다. 배가 남산만 해져 내 발 하나 스스로 닦는 것도,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소한 일조차 버거울 때 마저도 나는 그저 행복했다. 펭귄처럼 뒤뚱이는 내 모습조차 사랑해 줄 수 있었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너를 배에 품고 있는 나도, 더 사랑하게 되었던 날들이었다.

용기 내어 자연분만을 했다면 이런 기분이 덜했을까. 제왕절개 후 마취에서 서서히 깨어났을 즈음,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난 자리가 그대로 쭈굴하게 쳐져버린 배를 쓱쓱 문지르며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병원에서 퇴원해 조리원에 갈 때까지도 비어버린 배를 습관적으로 문지르며 이게 무슨 감정일까, 내가 아는 단어들을 이것저것 갖다 붙여보았었다. 퇴원을 준비하며, 진통에 병원에 급하게 달려올 때 입었던 내 회색 기모 원피스(임부복을 여러 벌 사는 것도 아까워, 그 한벌로 겨울을 나서 남편이 유니폼이라고 불러줬더랬다.)를 다시 입었을 때, 입원때와는 사뭇 다른 옷태를 보며 마침내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느꼈던 감정은 ‘상실 없는 상실감’이었다. 부모가 되는 길에는 수많은 과업이 있지만, 그중 첫 번째를 하려고 노력했다. 아이는 나와 다른 타인임을 인지하며, 나만의 바람은 욕심임을 알고 내려놓는 것. 갑자기 세상으로 튀어나와 아직은 어리둥절해 있을 아가를 응원하는 것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우리는 손을 마주 잡고 눈을 맞추며 함께 웃을 수 있는 더 좋은 날들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기로 했다.

아가를 처음 본 것은 수술 다음 날 저녁이었다. 수술한 지 하루가 꼬박 지나서야 남편의 부축을 받아 겨우 휠체어에 앉을 수 있었다. 남편이 미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양팔을 팔걸이에 걸쳐 상체를 지지해야 했다. 나도 남편도 낑낑대며 신생아실 앞에 도착했다. 열 쌍이 넘는 엄마아빠들이 대기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중 휠체어에 앉아 온 산모는 나뿐이었다. 자연분만을 하면 마치 아기를 낳은 적도 없는 양 저렇게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건가. 경이로울 따름인 마음이 밖으로 비치지 않게 애쓰고 있을 즈음, 대기자 명단에 내 이름이 떴다. 3번 000님 아기’. 신생아실 유리창 위 ‘3’이라고 붙은 숫자 아래로 우리는 이동했다. 곧 커튼이 열리고 나는 휠체어에 앉은 채로 고개를 쭉 빼고 턱을 양껏 치켜들었다. 유리창 너머에는 나의 아기가 있었다. 꽁꽁 싸맨 속싸개 위로 넙데데한 얼굴은 누굴 닮은 거지. 가만히 감겨있는 옆으로 길쭉한 눈은 여기가 엄마 뱃속인지 아닌지조차 모르는 듯했다. 가끔 저도 모르게 벌렁이는 콧구멍만이 이제는 폐호흡으로 세상에 나왔음을 알고 있다-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저 고집스럽게 앙 다문 입술은 누굴 닮은 걸까.’ 도파민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효과 좋은 진통제였다. 어느새 절개한 배의 통증은 까맣게 잊었다. 또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 또한 까맣게 잊은 채. 지금 여기 이 순간. 저 3.26kg의 자그마한 아가와 그 아가를 바라보는 나만 존재하는 듯 느껴졌다. 예상은 했지만, 나는 정말이지 요 녀석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코로나의 여파로 모유수유시간은 하루 30분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생존의 본능은 어디에 간 걸까. 아가는 젖을 잘 물지 못했다. 어설픈 어미는 그저 미안했다. 그럼에도 아가를 피부로 느껴가며 품에 안고 있는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매일을 3분 같은 30분 만을 기다리며 지냈다. 그 사이에는 열심히 젖을 유축해 신생아실로 나르는 게 일이었다. 젖병 바닥을 겨우 적실만큼 나오기도, 하고 그보다는 아주 조금 더 나와 몇 모금은 되겠다 싶은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80ml를 넘긴 적이 없다. 모유수유에 큰 뜻은 없었으나, 양손에 젖병 가득 모유를 넉넉히 들고 가는 산모들을 보면 절로 시무룩해져 시선이 떨어졌다. 비싼 가방을 들고 있는 여자들을 곁눈질로 부러워하는 마음은 이에 비교할 수 없는 티끌이었다. 이렇게 모유와 씨름하던 날은 얼마가지 않았다. 젖몸살도 없이 자연스레 젖이 말랐다. ‘그나마 그건 다행이다.’라고 해야 할지. 작은 일은 작은 대로 큰 일은 큰 대로 ‘안쓰러운 우리 아가‘를 연신 외치던 시절이었으므로, 아직 호르몬이 불균형인 엄마는 그에 마저도 눈물지었었다.

그렇게 불균형인 호르몬과 싸우고 잘 추스러지지 않는 몸을 어르는 사이, 병원 퇴원일이 가까워지고 우리는 조리원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전 03화나의 출산 이야기 [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