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라기보다는 에세이
이 글은 제가 2021년 11월에 블로그에 올린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레시피라기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는 점을 참고하시어 읽어주세요.
레시피 요약
1. 손 자르지 않고 호박 손질하기 : 껍질 깎아내고, 비슷한 크기로 자르기
2. 물에 20분간 삶기
3. 믹서에 곱게 갈아주기
4. 다시 살짝 끓여주기
5. 소금+설탕 간 해서 맛있게 먹기
대충 사람 머리통 두 배 ... 는 오버인가. 아무튼 그쯤 되는 호박이었다. 아빠가 올해 봄, 춘양 시장에서 호박 모종을 사 왔는데 종자는 잘 모르겠지만 심어보았단다. 껍질색은 단호박이고 사이즈는 늙은 호박이었는데, 알고 보니 청둥호박이었다.(유튜브에서 이혜정님의 호박죽 만드는 영상을 참고하다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항상 그랬듯, 호박 줄기는 작물을 심기 힘든 언덕배기를 감싸 오른다. 아부지 텃밭의 다채로운 작물들 사이로, 이 호박의 덩굴이 여름 내내 푸릇하게 있었다. 아부지가 사랑과 관심으로 키운 건지, 저가 알아서 잘 커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마아빠한테서 받아온 것들은, 내 돈 주고 산 것들보다 쉽게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받아온 지 2주가 지난 오늘에서야 호박죽을 끓여보겠다 결심하고 긴 여정을 떠난다.
수박을 절반으로 가르던 것을 생각하며 호박을 찌르니 칼이 안 들어갔다. 세상에, 엄청 단단해서 칼을 사방으로 넣어가며 겨우 반으로 잘랐다. 호박이 너무 커서, 절반만 죽으로 끓이기로 했다.
태자를 숟가락으로 다 긁어서 빼주었다. 태자라는 단어를 유튜브 영상에서 처음 들어보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대상이지만 명칭은 모르는 흡사 '피자세이버' 같은 느낌의 단어...처럼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아무튼 태자에 영양분이 제일 많다며 버리지 말라는 요리연구가님의 말씀을 따라 잘 모아두기로 했다.
그러다 요런 신기한 씨앗도 발견했다. 엄마한테 사진을 보냈더니 화분에 심으란다. 내 화분들은 손바닥만한디 ... 잠시 잭과 콩나무를 꿈꾸어보았다.
단호박은 전자레인지에 4분 돌리면 말랑말랑해져서 껍질을 까기가 쉽다던데. 이 친구는 5분을 돌려도 매한가지 딱딱하다. 한 번 더 돌릴 생각 없이 그대로 칼을 들이댔다. 껍질을 바깥으로 비져내며 20분 동안 혼자 낑낑댔다. 지금 생각하니 그냥 전자레인지에 5분 더 돌릴 걸 그랬다.
사진의 오른쪽 호박은 먼저 껍질을 벗겨냈던 것. 왼쪽의 푸릇푸릇 껍질이 남아있는 것은 두 번째로 손질한 것. 손에 힘이 빠져 끝까지 정성스럽게 깎아낼 수 없었다... 어쨌든, 20여 분의 사투 끝에 자기만족을 얻었다... 이만한 결과로도 뿌듯한 주말이라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다.
열심히 조각내어 20분을 삶았다. 집에 믹서기라고는 사진 속의 저 과일주스용 믹서뿐. 호박을 꽉꽉 채워 믹서기를 여섯 번을 돌렸다. 잠시 큰 용량의 믹서에 대한 구매욕이 생겼으나... 생각해 보니 저 작은 믹서도 몇 달 만에 꺼내본 것 같다. 다시 미니멀라이프로 생각 전환.
완성! 되기 오 분 전. 잘 갈려 수프화된 호박을 불에 올려 휘휘 젓고 있으려니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호박을 반으로 가르고부터 두 시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만저만 고난을 헤치고, 마무리로 갈린 호박을 한 번 더 끓이며 휘휘 젓고 있다고 했더니. 엄마가 그걸 뭐 하러 젓고 있냐고, 전분이 들어가지 않아서 눌어붙지 않는 댔다.
바로 주걱을 던져버렸다.
아. 힘들었다...
후기
9시쯤 귀가한 동생과 '은비까비의 옛날옛적에' 중 '선녀와 나무꾼' 에피소드를 유튜브로 보며 호박죽을 먹었다.
아, 일단 맛 평가부터 하자면... 맛있다고 했다, 동생이. 동생은 내가 한 노력을 봐서라도 다 맛있다고 해주어서 객관적으로 얼마나 괜찮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크리미한 호박죽에 소금+설탕을 입맛에 맞게 넣으면(동생은 설탕을 안 넣어도 맛있댔다), 부담 없는 야식으로는 제격이었다. 배는 매우 빵빵하게 부르나, 속은 부담스럽지 않은 요리.
뜨거운 호박을 작은 믹서 컵에 넣어 갈고, 그릇에 옮기고를 반복하다 뜨거운 호박죽이 손에 튀었다. 그래서 문득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생각났다. 선녀를 따라 하늘나라로 갔던 나무꾼이 땅에 혼자 계시는 노모가 걱정되어, 페가수스(?) 같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내려왔더랬다. 아들이 객사했을까 노심초사한 노모의 안부만 묻고 하늘나라로 다시 올라가야 했던 나무꾼에게, 늙고 가난한 어머니는 뜨거운 죽이라도 한 사발 먹고 가라며 부엌에서 부랴부랴 죽을 한 그릇 퍼 내온다. 그런 노모의 모습에 눈물을 훔치던 나무꾼은 뜨거운 죽을 타고 있던 말에게 쏟게 되고, 발버둥 치던 말에서 떨어져 다시 하늘나라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아무튼 그 뜨거운 죽이 떠올랐다. 그러다 마침 엄마한테 전화가 왔고, 반가워 더 신나게 호박죽을 고되게 끓인 한풀이를 늘어놓았다. 아직도 이렇게 어리광을 떨 수 있어 좋다.
여담
아빠 집에서 호박을 두 개 들고 왔었다. 작은 호박은 할로윈 기념으로 펌킨 헤드를 만들었다. 일주일 동안 우리 남매의 '윌슨'이 되어주었다. 지금은 호박을 파낸 안쪽으로 모락모락 곰팡이가 피어나, 이 친구의 끝을 어떻게 해주어야 하나_ 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다. 일 번, 땅에 묻어준다. RIP. 이번, 우리의 귀요미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아파트 음쓰통에 얼굴이 잘 보이게 넣어둔다. 농이다. 어떻게든 간에, 아무래도 보내기가 마음이 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