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평소에도 약속을 잡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아이들과 함께 가족끼리만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친정이 500m 거리에 있음에도 이름 붙은 날이 아니면 시간 맞춰 같이 식사하는 일도 드물다.
우린 그게 편했다.
그래도 되는 거라 생각했다.
남편은 부고를 듣고 새벽에 먼저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난 뒤늦게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예정했던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학원에 결석을 알리고 발인까지 보고 올라올 수 있도록 짐을 챙겨 뒤따라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워낙 어려서 보고 최근 만난 적이 없어 기억도 없을터, 아이들에게는 가상의 인물과 같았을 것이다.
평소 자주 보는 이모의 아들과 아이들과 관계를 가져와 설명해 주니 그제사 끄덕인다.
남편의 투병을 지켜보고 끝내 보내야 했던 부인은 아이 앞이라 의연한 척 애썼지만 순간순간 차오르는 눈물은 어쩔 도리가 없어 보였다.
돌아가신 고인의 동생, 남편과는 동갑내기 이종사촌, 내게는 아주버님이 다가와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네셨다.
너희들 밝고 건강하게 자란 거 같아서 삼촌이 아주 기분이 좋다.
내가 누군지 알아?
분명 아이들에게 물었는데 내 말문이 막혔다.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넨 아주버님도 생각이 많은 듯 보였다.
왜 그동안 자주 만날 기회를 만들지 못했는지, 이제야 보는 건지 아쉽다며 후회 섞인 푸념들을 늘어놓았다.
어느새 아이들 옆에 와 앉아있던 남편도 생각이 많아 보였다.
솔직히 난 그동안 남편이 친인척 간 왕래 없이 지내는 것이 편했다.
하나뿐인 여동생과도 명절이나 어머님 생신에만 만나는 남편이 은근히 고맙기도 했다.
(그렇다고 시어머님까지 1년에 두어 번만 보는 건 아니다. 그녀는 우리와 한집에 사신다.)
그렇다고 내가 자발적으로 시댁 모임을 주도하거나 기획하는 싹싹한 며느리상도 못된다.
지금까지 오직 내가족만 챙기며 사는 것에 불만도 없고 불편함도 없던 우리였다.
수년만에 만났지만 남편은 이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 동분서주한다.
남편과 부모, 자식을 잃은 원가족들이 정신이 없는 상황에 남편이 눈치 빠르게 일을 처리하니 다들 고마워하신다.
나 또한 지금까지 수년간 얼굴보지 않고 살았어도 불편함이 하나도 없었는데, 갑자기 수년간 얼굴을 보지 않고 살았던 것이 죄송하고 후회가 되었다.
이것이 핏줄의 연대감인가, 어렴풋 생각했다.
발인 당일
운구 행렬에 남편이 가장 앞에 자리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물었다.
(아들) 아빠 왜 저기 있어?
(나) 원래 가까운 가족과 친척이 운구를 하는 거야. 그게 가족이야.